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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moon society Aug 06. 2016

천천히 오래보아야 아름답다.

이문동 느림 갤러리

느림은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은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


숨 좀 돌리고 가면, 뒤쳐질 것만 같았다. 먹고 살기 힘들 것 같았고 행복은 저 멀리 있을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등바등 더 빨리 바쁘게 살려고 노력했다. 나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리듬이고, 누군가는 '대한민국의 감성'이라고 말한다. 그냥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할 일을 하나라도 빠르게 해치우고 싶을 뿐이다.


빠름에 중독되어버려 이내 곧 사회는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의 미덕을 훼손시켰다. 느린 것의 가치를 상실해 버린 오늘날, 우리는 더욱 더 외롭고 쓸쓸해졌으며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저 물리적 공간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빠름'이 기계의 속도라면, '느림'은 인간의 속도이자, 자연의 속도이다. '느림'은 소중한 것들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경건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게 한다. 신선하게 바라본 세상에서 우리는 현재의 삶을 충분히 음마하고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물리적 공간'으로만 존재했던 곳들은 "의미 있는 장소"로 인식되며, 그 흐름 속에 사람이 숨 쉬고 있다.


우리가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함께 호흡하며 발붙이고 있는 이곳, 이문동은 '빠름'의 시선에서 퇴보한 공간이다.  어딘가 어설픈 집들과 좁은 골목들.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뒤쳐져 버렸다. 그러나 이는 현대의 가치인 '빠름'과 기계의 속도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으로 이문동을 메워나갔음을 의미한다. 각박하고, 막연한 목표에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현대인에게 자연의 속도를 배우며 길을 걸었던 어린 시절과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저마다의 시간을 천천히 그리고 차곡차곡 쌓으며 '느림'의 속도로 살아가는 이문동과 그 가치를 담고 있는 장소의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30년간 대대로 이문동의 손 때를 간직해온 전통 있는 헌책방


헌 책 삽니다, 팝니다.



낡고 촌스러운 것이라면 치를 떠는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친구가 나타나면 보고 있던 헌책을 멀리 던져버리고 능숙하게 당황한 기색을 감췄다. 나는 헌책을 좋아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가난한 사람으로 보이기는 싫었다.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지만 왜 자꾸 보지도 않는 잡지를 사게 되는 것일까. 그 잡지에는 나의 흥미를 끌만한 것이 없지만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꽤 그럴듯한 사람이 되기에는 좋았다.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서 한동안 발을 끊고 있던 이 헌책방에 다시 오게 되었다. 이문동에서 유일하게 된 이 헌책방은 약간은 풀이 죽어있었지만 그 고집은 어디가지 않았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30년간 책방을 운영하시면서 신념을 하나 가지고 계셨는데, 바로 책방을 다양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실로 할아버지의 책방에는 잡지, 동화, 만화책부터 건축, 미술, 경제, 역사 등 온갖 종류의 책들이 한 데 어울려 모여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고서점이 한 카테고리만을 전문으로 하는 헌책방에 절대 기죽을 것은 아니었다. 신고서점에는 유독 외국어 서적이 많은데다가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 러시아어등 다양하기까지 하다는 점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이 말씀을 하시며 묘하게 자부심을 드러내셨다.


이는 외대생과 신고서점이 공명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각양각색의 외국어 서적 안에는 이문동에서 꿈을 키우던 외대생들의 이야기가 서려있고, 그것은 앞으로 꿈을 키워나갈 또 다른 외대생들에게 팔려 나갈 것이다. 신고서점은 학생들의 노력과 열정을 품고 있는 장소이며 그렇기에 이문동에서 특별하다.



주인집 할아버지에게 여쭤봤다.


"할아버지 이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뭐예요?"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띄우신 채,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신고서점에는 베스트셀러가 없어요.


그렇다. 신고서점에는 베스트셀러가 없다. 이곳에서는 어떤 책도 눈에 띄기 위해 애쓰지 않으며 그렇다고 숨어있지도 않았다. 그들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누구도 서로를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각자의 멋과 개성을 유지한 채, 서로의 출신과 성분을 구분하지 않고 배열되어 있는 신고서점 안에는 다양성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때문에 책을 찾는 노력과 시간은 다른 서점에 비해 배로 들겠지만 책들이 각자의 가치를 온전히 발할 수 있도록 함께 존재하고 있는 방식을 구경하는 것은 참으로 재미가 있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마치 특별한 목적지를 갖지 않고 방랑하는 여행자 같았다. 자신이 필요한 책만을 효율적으로 골라 잡고 빠르게 계산대로 이동하는 여타 서점의 사람들과 달리, 이곳의 사람들은 시계를 쳐다보지 않았다. 단지 발걸음이 닿는 대로, 책 속에 남겨진 낙서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서점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는 듯하였다. 그리고 짧게는 30분, 길게는 2~3시간씩, 창문 너머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가 무색하리만큼, 그 공간 속 자기만의 고유한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나만의 베스트셀러를 찾는 다는 것은 당연히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곳에 와서야 깨달았다.

신고서점은 내년이면 문을 연지 30년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새 것을 좋아하고 내 친구 말에 의하면 새롭지 않은 것은 촌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께서 헌 책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새 책도 한 번 보면 헌 책이에요." 새 책이 참으로도 덧없는 것임을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사실에 할아버지는 가슴 깊이 답답해하시는 듯했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자칫 느렸다가는 촌스러워질까봐 빠르게 '새로운'것을 좇아간다. 그 중에서 얼마나의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얻었을 때에 성취감 보다 허무함이 더 길다는 것을 알까. 나는 이곳에 그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문동을 보살피며 온정의 손길을 뻗는 관불사


낙오된 사람이 있었다. 과거,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가 있던 이문동은 5층 이상의 건물 증축은 할 수 없었다. 그 탓에 당시 서울을 가득 메웠던 재개발의 불꽃은 어쩐지 이문동을 피해갔다. 그래서 모두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문동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던 나약한 누군가는 이문동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 살던 이웃을 떠나보내는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좀 더 나은 삶을 찾아간 사람에 대한 동경이었을 수도, 본인의 현실에서 오는 열등감이었을 수도 있다. 그 날의 이문동은 어지러웠을 것이다. 그들에게 여유를 주고, 보살펴줄 그 어떤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외대 후문에서 한예종으로 가는 익숙한 길을 조금 벗어나면 40년 전부터 그 자체로 여유와 보살핌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곳이 있다. 이문동 골목 그 깊숙한 곳에서 관불사는 이문동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관불사의 한 스님은 이문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민들 때문에라도 이 후미진 곳을 떠날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문동에는 예전부터 어려운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럴수록 저희가 더 이 동네에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대불상이 관불사의 지붕에 놓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부처님께서 이 낮은 동네를 살피셨으면 하는 바람에 지붕 위로 대불상을 올렸다고 한다.



관불사는 사람들이 떠난 뒤 매서운 차가움만이 가득 메워진 이문동에서 남은 이들이 가슴 속 허전함의 상처를 따뜻한 온기로 채워갈 수 있도록 해왔다. 사색과 인내 그리고 성찰의 시간은 빠름에 편승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괜찮다'며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고 있다.


위로가 필요한 건, 비단 이문동 주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관불사는 빠른 한국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외국인 교환학생들을 낮은 문턱에서, 트인 마음으로 품어주는 이문 마을의 위안처이다. 취재하러 온 우리들에게 과일을 내어 주시는 스님의 모습에서 오랫동안 이문동 사람들에게 닿았을 온정을 짧은 방문에서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요즘은 자주 오던 베트남 학생이 도통 모습이 보이질 않아 걱정이 된다던 스님의 짧은 한마디에서도 학생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 있었다.


관불사에는 여느 큰 절처럼 템플스테이 등의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절의 매력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여느 서울에 있는 큰 절들은 사람들이 북적여 절도 급하게 해야 한다던데 이곳은 하루 종일 108배하기에도 부담 없는 곳이다.




관불사의 문은 저녁 9시부터 아침 7시까지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데, 편히 들어와 스님께 손을 모으고 인사를 드린 다음 절을 3번 올리면 된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기거나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빠름을 잊고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이곳을 채워가고 있는 어색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과연 서울이 맞나 싶다.


관불사는 이곳을 찾은 이에게 종교를 묻지 않는다. 바라는 것도 없다. 이곳의 느린 시간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빠른 것이 잘못된 것도 느린 것이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빠름의 가치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을 나가서도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관불사는 이문동 골목 끝자락에서 관불사만의 속도로 존재하며 그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 이소원 이수정 이현규 정창현 조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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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동 문화지도 : http://alertsky3.wixsite.com/i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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