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by 임월

opening


여백을, 정말 비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아름다움도 찾을 수 없어.

눈으로 보기보다 마음으로 보아야 해.

보이는 것보다 가려진 것에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비로소 진정한 여백의 미를 알 수 있어.


어쩌면 사진은 눈에 담은 현상의 기록에 앞서,

충분히 은유하기 위해 두 발로 하는 일인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고 있어.

여전히, 어디론가 떠나고 있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추종하면서.




scene #1. 필름


필름으로 사진을 남긴다는 건, 매번 '무엇을 남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필름은 한 장 한 장이 유한하니까. 셔터를 누를 때마다 오늘의 기회는 조금씩 줄어든다. 시간은 분명한 끝을 가지고 있고, 나는 이 안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어떤 순간을 붙잡을 것인지, 어떤 순간을 흘려보낼 것인지.


필름을 붙들곤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달랐을까. 이미 필름을 여러 장 낭비해 버려서 정작 찍어야 할 순간을 놓친 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하늘이 유독 맑던 날. 함께 걷던 이의 웃음이 번져오던 순간. 그러나 너무 많은 셔터를 눌러버린 뒤라면, 소중한 장면들을 그대로 태워버린 거라면.


놓친 것들로 못내 아쉬워하다, 거울을 바라보니 손에 쥔 것은 내가 선택한 탄내 나는 필름뿐이다. 선택들이 나를 이루었고, 그날의 프레임들이 하루를 만들었다. 그렇게 쌓인 하루들 위에 내가 있었다. 나를 조금씩 만들어온 하루.


컷수가 다하고 나서, 조금은 길지도 모를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진을 현상한다. 거기엔 예상치 못한 장면도 있고, 초점이 흐릿하거나 과하게 번진 것들도 있다. 때로는 마음을 다해 눌렀던 셔터가 공허한 결과를 남기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눌렀던 순간이 뜻밖의 온기를 품고 나오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결과를 바꾸지 못한 채 바라본다. 이미 찍힌 사진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날의 마음을 조용히 떠올려보는 일뿐이다.


그날의 선택이 옳았는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건, 어제의 셔터를 분명히 눌렀다는 것. 그날의 필름이, 오늘의 나를 남겼다는 것.




interlude A.

령록. 사랑의 정의가 바뀌더라도,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던 기억만은

오래 남기를.




scene #2. 나를 모르면서


여덟 살의 겨울, 삼촌이 준 일회용 필름카메라로 찍은 첫 번째 사진은 내 발가락이었다. 실수로 눌린 셔터. 그 뒤로는 의도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본 천장, 칫솔에 묻은 치약, 엄마가 깎아주신 사과.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모든 것이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일기장 첫 페이지에 적었다. 나의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아야지,라고. 여덟 살의 못난 글씨로. 그리고 정말로 담아냈다. 오늘 점심에 나온 김치찌개가 너무 짜서 물을 세 번 마셨다는 것까지.


교복을 벗으면서 무언가 달라졌다. 사진을 현상해도 모아둘 곳이 애매해졌고, 일기를 써도 쓸 말이 없었다. 별일 없는 하루, 별일 없는 감정. 어제와 오늘 사이에 변화가 있었나? 없었다. 기록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요즘 어떠냐고 물어도 그냥으로만 답하던 시절. 정말 그냥이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뭔가와 뭔가 사이의 회색.


어느 해부터인가 다시 시작했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엄마의 뒷모습,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비 온 뒤 아스팔트 냄새는 찍을 수 없어서 젖은 땅을 찍었다.


글도 썼다. 일기라고 하기엔 너무 짧은, 메모 같은 것들을… 우리의 명함은 이런 것이면 좋겠다. 좋아하는 과일은 무엇인지…

왜 쓰는지 모르겠지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누가 찍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게 정말 내 시선일까?


적어둔 글들을 읽는다. 누가 썼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게 정말 내 손으로 쓴 게 맞나?


나는 애초에 명확한 형태가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 그렇게 확실해 보였던 나도, 아마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으려 한다. 카메라를 들 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뜨거움을 보고 있다는 게 확실하다. 펜을 잡을 때, 이 순간만큼은 감정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낀다.


나를 모르면서, 나를 기록한다.

여덟 살 때처럼.




interlude B.

"예미산에 왔으면, 어른들께 인사드려야지."

"응? 어디에?"

"저기, 뒤편에. 늘 보고 계셔.

가서 잘 왔다고, 잘 있다 간다고 말씀드려.

그러면 분명 좋아하실 거야."




scene #3. 하이라이트


소중한 순간들.

그곳, 그때의 사랑과 사람.


언젠가 세상이 모두 변하고 사라진다 해도

눈물짓지 말자.

내게 잊히지 않는 한 롤의 필름이 남아 있으니까.


언젠가 시간이 흘러, 나조차 변하겠지만

구백일 호 극장 어디에서는

지난날의 눈부신 하이라이트를

상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류의 해피엔딩을

이 장편 시네마에서 꿈꿔봐도 좋겠다.

아직 우리에겐, 남은 필름이 충분하니까.


한 번뿐인 삶에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내게 쌓여 있다는 것에

위로와 안심이 되기를.


이윽고, 그 기억 안에

편안하기를 소원한다.




interlude C.

나를 두드리던 빗소리.

비가 갠 오후의 바람. 오랜 친구의 전화.

처음 들어간 카페에서 나오던 김사월의 디폴트.


오늘 유달리 막히지 않는 도로를 달린 버스.

심지어는 그냥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아! 바라본 하늘에 지던 노을.




scene #4. 미완의 관찰자


서로의 눈빛이 마주할 때의 미묘한 설렘,

작은 배려와 애정.

사랑은 드라마틱한 장면보다는,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들 속에 제 얼굴을 드러낸다.


이 순간, 사랑이 얼마나 다채롭고 보편적인 감정인지,

동시에 얼마나 개인적이고 특별한 감정인지.


사랑의 관찰자이자,

사랑의 역사를 기록하는 증인이고 싶다.


멈추어 영원히 남을 감정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살아 움직이는 사랑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을 다시 돌아보고,

순간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는 얼마나 모순적인가.

사랑을 의심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사랑을 동경한다.




scene #5. 공드리


지난 기억에 아픈 사람. 새로운 만남에 설레는 사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모두를 관통하는 감정은 사랑.


만남과 연애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람만은 똑같다. 눈앞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 함께 보고 싶은 이가 떠오르거나, 힘들고 지쳐 모두가 내 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 아무 이유 없이 포근히 안아줄 이가 있거나. 각자 꿈꾸는 사랑의 형태는 다르지만 행복을 향한 마음이란 점은 같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만나, 단 한 번의 다툼 없이 편안하길 바라는 건 환상에 가깝다. 치열하게 싸우고, 후회 없이 표현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언제나 믿어주는 것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 과거가 아닌 현재이니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마지막 "Okay"처럼,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면, 라쿠나사를 찾을 필요는 없겠지.


만일 그들처럼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해도 기억을 지우진 않을 것 같다. 그때의 온전한 기쁨과 눈물 모두 나의 몫이었으니까.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다시 만나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같이 걷던 길, 서로 마주 앉아 웃었던 순간, 불현듯 들려온, 함께 흥얼거리던 노래. 그녀가 아니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떨림을 잊고 싶지는 않으니.




scene #6. 경주의 밤


칠 년 전, 경주의 한량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날의 공기는 유난히 나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우연히 마주친 타인들. 우리는 별다른 기대 없이 인사를 나눴고, 별다른 이유 없이 한량의 거실에 함께 있었던 것 같다. 몇 잔의 술잔이 오가다 취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너는 무얼 좋아하는가. 그가 서울의 '빵'과 '벨로주'를 안다고 했을 때, 그리고 우리가 같은 날에, 바로 옆 자리에서 그녀의 공연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좁은 무대 위를 부유하던 사비나앤드론즈의 노래가, 잠시 우리를 같은 공간 속에 앉혀두었다. 이 거실 안에서 시간도, 사람도 스무 살의 그때로 잠시 멈춰 선 듯했다.


만남은 참 아리송하다.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하지만 어떤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이 남자와의 짧은 인연도 그러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리 대단한 대화를 나눈 것도, 특별한 여행을 함께 한 것도 아니었다. 각자의 내일로에서 우연히 만난 둘이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 같은 음악을 좋아했고 비슷한 감성을 공유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이 찰나가 내게는 꽤나 강렬하게 남았으리라. 시간이 흘러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날의 공기를 여전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음악에 의해 잠시 연결되었다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관계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건, 살아가면서 점점 더 실감하게 된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고 해서 더 깊이 닿는 것도 아니고, 짧았다고 해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와 나는 서울에서 몇 번의 모임울 통해 다시 만났지만, 코로나 이후엔 오래도록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고, 서로의 삶을 잘 알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 짧은 경주의 밤. 그곳에서 나눈 몇 마디의 대화만큼은 지금까지도 내게 남아있다. 음악을 통해 잠시 같은 세상을 바라보았던 순간, 그게 우리의 인연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가 열 번의 사계를 보낸 연인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놀라면서도, 그날 밤 들뜬 표정으로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눈으로, 자랑스럽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모습이. 그래서였을까—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결혼하는구나, 마침내.


나는 결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신랑이 식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가 내게 청첩장을 보내며 말했다. "뭔가 해치우듯이 사람을 만나는 게 싫어서, 너는 그런 마음으로 만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잠시 멈췄다가, "식이 끝나고, 제대로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보자." 라고 덧붙였다.


그의 메시지가, 손에 조금 번졌다. 전자 청첩장이라는 차가운 매개를 통해서도, 진심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그가 여전히 그날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칠 년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멀게도, 이상하리만큼 가깝게도 만들었다. 우리는 짧은 순간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감정을 나눴다. 그걸로 충분하다. 이제 그는 새로운 길을 걷고, 나는 그의 하루를 기쁨이 조금 더 차지했으면. 혹여 많은 역경과 풍랑이 기다릴지라도 미슬과 함께 극복하기를,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 시간이 모든 걸 덮어버리더라도, 그날 밤의 경주를 기억하며.




interlude D.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초록빛 파도에

예를 들면 꽃의 모습으로.

예를 들면 새의 모습으로.

예를 들면 바람의 모습으로.




scene #7. 주재현


구백일 호에서 성수동까지, 왕복 3시간 40분.

머리를 자르러 가는 작은 여행.


역을 가로질러 그의 이발소로 가는 길에 지난 8년이 담겨 흐른다. 한 달 한 달 다르게, 점점 가득 들어차는 성수의 골목과 사람들이 꼭 그의 넉넉한 마음 같다.


헤드워크에 매달 한 번쯤 들를 때면, 새로운 영감이 샘솟는다. 지난 발자취와 지금 나아가는 일, 그리고 아직 닿지 않는 꿈을 열정적으로 나누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게 돈이 되나?” 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꺾인 나무라 부르는 그가, 나이가 들어 서글프다는 그가 여전히 꿈을 품고 있기에, 내 눈엔 여전히 반짝이는 소년으로 보인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비록 그곳에 닿지 못하더라도, 바라본 방향대로 끝까지 나아가겠다는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고 싶다. 더 이상 꿈을 말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너는 아직 젊다, 너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라고.


흐름이 흐를 때 그대로 다이브,

유지해 바이브!


추신)

네, 앞으로 육십 년은 우리들 머리 잘라야 하니까 건강관리에 각별히 유념하십시오. 적당히 운동하고 지금처럼 저탄수 고단백 식단을 유지하고, 화내지 말고 온전히 사랑하며 최선을 다하시고요. 연초 치우고, 음 바이크는 예순까지는 봐드립니다. 되도록 쉰 까지는 정리했으면 좋겠지만. 글쎄요. 페달 밟을 허벅지 근육이 남아 있을까? 행여 우리보다 먼저 가는 불상사는 없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책임지고 마지막에 올라오십시오.




interlude E.

잘 나와?

응, 아주 잘 나와.

지금 빛이 너무 좋아.


…아니, 예뻐?

응. 예쁘다.

진짜, 너무 예쁘다.




scene #8. 바보들의 헌사


스스로 귀히 여기거나,

귀히 여기려 노력하는 적당히 세속적인 바보들.

그 오랜 시간 그대로 바보라 다행일까.




interlude F

바람은 어느 꽃을 걸어

비를 지샌 이 가을로 오는지.

나는 피어나기 위해 진다.




ending


태양의 빛은 눈을 가리지만,

남겨짐을 담아낸 시선은 멀리 본다.


세상이 어둠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


하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

서로의 눈에 담긴 불씨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