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오늘 예미의 하늘은 맑습니다. 첫서리가 내린 밭 위로 김이 오르고, 지붕마다 흰 연기가 걸려 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흙냄새가 코끝을 스칩니다. 젖은 흙은 오래된 아궁이 냄새를 닮았습니다. 저는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아픔이 날마다 다른 얼굴로 돌아옵니다.
잃어가는 것들과 마주하는 일이 이제는 조금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 상실이 전부 다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에요. 잃은 게 아니라,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라 여겨서요. 그리워한다는 건 아직 마음에 함께 있다는 뜻이니까요.
쓸쓸한 길을 걷고 있지만 외롭진 않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의 돌 하나를 내려놓게 되고, 동시에 가슴 한쪽을 더 단단히 붙들게도 됩니다. 참 이상한 길이에요. 보내는 것과 붙드는 것 사이에서 사람은 조금씩 단단해지는가 봅니다.
오늘은 어머니와 산을 올랐습니다. 당신이 어머니를 서울로 보내시던 그날의 언덕. 바위에 앉아 아래로 멀어지는 딸을 바라보며 한참을 울고 계셨다고 합니다. 어여삐 마지않던 딸을 품에 남기고도 놓아야 했던 그 순간. 어머니는 할머니의 떨리던 등을, 바위 위에 남은 눈물 자국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이별로 이어지는지, 떠나보내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우리는 왜 늘 그렇게 늦게야 알게 되는 걸까요.
“고되게 왔구나.“ 천으로 가리개를 쓰고 옥수수밭을 헤치며 나오시던 목소리. 요즘 따라 자꾸 귀에 맴돕니다. 땅을 일구던 손에 묻은 흙, 감자밥 냄새가 피어오르던 부엌의 김, 굳은살 하나하나가 우리를 향한 사랑의 무게였겠지요.
할머니— 그렇게 부르며 달려가면 밭고랑 끝에서 손을 흔들던 모습, 읍내에서 사 오신 카라멜을 내어주시던 손. 세상에서 가장 달았던 사랑방의 사탕. 대청마루, 물 길러 가던 우물, 녹슨 바가지에 배어 있던 저녁의 냄새. 모든 게 당신의 하루였고, 제 어린 날의 세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함백초등학교를 오가며 밟던 길. 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흔들리던 그 길. 소풍날 도시락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예미산허리에 묻혀 있습니다. 정 많은 이웃들이 오가던 엽기소나무길, 된장찌개 냄새, 김치찌개 냄새, 서로의 끼니를 걱정하던 마음들. 할아버지가 밤새 지키던 소나무 자락까지, 한 그루 나무에 담긴 평생의 지킴과 기다림.
이제는 이 길을 혼자 걷기도 하고, 가끔은 친구들과 함께 걷기도 합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의 냄새가 달라집니다. 봄엔 젖은 흙냄새, 겨울엔 마른나무 냄새. 그 변화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흘려보내며 살아갑니다. 가까이 두었던 기억도, 사랑하던 사람들도, 세월과 함께 천천히 멀어져 갑니다.
언젠가는 저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영원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다만 한 줌의 추억이라도 남아, 흙과 풀과 나무로 숲이 되어 오래도록 다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별빛이 스며드는 밤입니다. 친구들은 이곳이 참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예미산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그럴 때면 당신의 시선이 이 모든 걸 바라보고 계신 듯합니다. 떠난 뒤에도 우리를 어루만지는 마음, 지평선 너머에서 여전한 손길을 느낍니다.
시간은 흐르지만 사랑은 이 땅에 남습니다. 당신이 딸에게 주신 사랑이 저에게로, 또 제가 길을 걸으며 만나는 이들에게로. 그렇게 이어질 것입니다. 예미 산자락의 흙이 나무를 키우고, 나무가 다시 생명을 품어내듯,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순환하며 남겠지요.
부디 이 길 위의 작은 흔적들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남긴 모든 순간들이 이 땅에 머물며, 당신이 사랑한 예미산과 함께 만 년쯤은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주신 온기와 더불어, 정말 오래도록.
그리운 마음을 담아.
당신의 손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