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미를 내려오면서도

by 임월

가을의 산기슭 공기가 낮게 눕는 저녁, 예미는 어둡지 않았다. 대문쇠를 밀자 경첩이 한 번 울었다. 마당 흙에서 젖은 송진 냄새가 피어오른다. 쌓아둔 장작 위로 그늘이 길게 미끄러졌고, 나무는 옹이마다 가시가 박혀 있었다. 화로 곁에 웅크려 마른 솔가지를 가늘게 모으고 종이 모서리를 접어 불을 옮겼다. 불씨가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적막, 성냥 머리가 스치는 한 점의 황. ‘딱’ 소리에 방이 느리게 데워진다. 천장 대들보의 그을음이 불빛을 받아 미세하게 번들거리고, 창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은 금세 밀려난다.


불이 붙자 나무가 속을 내보였다. 수액이 맺히다 터지는 소리, 옹이가 튀며 흩뿌리는 작은 불꽃, 황갈색 껍질이 말려가며 드러내는 결. 그때마다 벽에 걸린 오래된 액자 유리 위로 붉은 점들이 스쳐간다. 누군가의 옆모습을 잠깐 비추고, 이름 없던 그림자들이 자리를 바꿨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여 아쉬워하던 찰나, 손바닥에 재가 묻는다. 보기보다 따뜻한 재.


불은 예미를 데우기보다 집의 말을 먼저 풀어놓았다. 마루가 부풀며 낮게 울었고, 서까래 위 먼지가 한순간 떠올랐다가 내려앉는다.


고개를 들면 굴뚝이 인사를 한다. 긴 숨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연기가 하늘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었고, 나무가 타는 동안 내 이름의 모서리도 조금은 둥글어졌을까 하고, 불빛을 오래 붙들었다.


불길은 날마다 다른 얼굴이다. 오늘의 불에는 오늘의 소리가 섞인다. 마른 가지는 삽시간에 흩어졌지만, 굵은 장작은 자리를 제법 지켰다. 불은 지우기보다 속을 드러낸다. 잊었던 순간이 옹이처럼 불쑥 솟았고, 붙잡아본 적 없는 말들이 불꽃에서 잠깐 빛났다 사라진다. 조상들의 집은 모두 듣고 있었을까. 벽이 뜨거워지자 냄비 뚜껑의 쇠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았고, 방바닥의 옛 나뭇결이 발등으로 스며올랐다. 불 앞에서 오래 앉아 있는 사이, 예미산의 대기는 짙어진다. 어둠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굴뚝 끝에서만 맴돌다 별과 섞인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불은 파랗게 숨을 골랐다. 장작의 살결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손등을 덥히는 온기는 남아 있었다. 이제 예미는 가볍게 비었고, 재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부삽으로 재를 한쪽에 모아 작게 산을 만들고, 숯 한 조각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문을 열자 어제의 풀잎이 젖어 있었다. 굴뚝의 연기가 아직 마당에 낮게 깔려 있고, 그 사이로 가장 먼저 일어난 새소리가 들린다. 불향이 옷자락에 오래 배었다.


예미를 내려오면서도 주머니는 식지 않았다.

우리 집의 불이 아주 조금,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