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백일 호 불향의 기하학

by 임월





반쯤 녹은 백열등이 흘러내리는 저녁

콘센트가 채 꽂히지 않은 구백일 호에서는

낮과 밤이 서로의 그림자를 갈아입는다


어머니의 마지막 향낭처럼

이 방의 모서리도 닳아져 간다

시간이라는 게, 벽지의 끝처럼

이렇게 처연하게 말려 올라가는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이

매일 다른 무게의 그림자를 쏟아낸다

잎사귀가 떨어뜨린 어제의 조각들이

벽 위에 읽히지 못할 편지를 쓴다


손때 묻은 창틀 위로

계절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서리는 창 모서리를 핥아내고

겨울이 유리 뒤편으로 웅크린다



향로에서 피어난 연기는

시간의 미세한 틈을 비집고 흐른다

벽과 벽 사이 숨은 공간을 더듬어가며

비어있던 모서리를 채워간다


방 안의 대기는

순간마다 다른 농도로 섞인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숨에 주름을 만든다



구백일 호는 오늘도

제 자리를 더듬어 헤맨다

복도를 따라 흐르는 창백한 형광등 아래

벽들이 조금씩 호흡을 맞춘다


베란다 창을 두드리는 어둠이

방의 윤곽을 지우고 덮을 때마다

가구들은 몰래 자리를 옮긴다

서랍 속에 접힌 시간들이

한숨으로 번져 나온다



햇살 속에 떠다니는 먼지들은

각자의 궤도를 그리며 떠돈다

누군가의 부스러진 기억

혹은 닳아 없어진 시간의 찌꺼기


창을 열면

방 안의 우주가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한다

접힌 이불 위로 내려앉은 먼지는

또 다른 별자리의 시작점



밤이 깊어질수록

사물들은 제 윤곽을 잃어간다

책상은 더 이상 책상이 아니게 되고

의자는 등받이를 접어두고

옷장은 문을 닫은 채 벽으로 달라붙는다


어둠이 진해질수록

기억만이 제자리를 지킨다

창문 틈으로 기어드는 새벽이

지워진 시간들을 다시 그려낸다



구백일 호의 높이는

더 이상 숫자로 잴 수 없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매일 다른 깊이로 가라앉는다


향로의 재가 켜켜이 쌓이는 동안

시간은 은밀히 농도를 바꾼다

벽지 틈으로 기어드는 계절이

방의 무게를 결정한다



한밤의 구백일 호 싱크대에서

녹물은 여전히 제 색깔을 찾아 헤맨다

어차피 우린 모두

불향 한 줌의 빚쟁이일 뿐이야


보다가 만 서른 살의 창문을 닦으며

나는 오늘도 얼룩진 하늘을 빨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