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 <매일이, 여행>(人生の旅をゆく)
그런데 지금이 되고 보니 투명하고 싸한 공기 속에 떠 있는 토스카나 경치의 그 부연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너무 추워서 툭하면 들러 몸을 녹였던 선술집의 와인 향, 차갑게 얼어붙은 밤의 돌길에 울리는 구둣발 소리, 하늘에서는 싸락눈이 흩날리는데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온천의 유황 냄새, 간에 좋다고 해서 몇 번이나 마셨던 쓰디 쓴 허브티의 뜨거움, 한 겨울 유럽 특유의 저 녹아내릴 듯 섹시한 분위기... 그 모든 것이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그립고 아름답다.
감기 때문에 고생한 그 친구가 했던 명언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좀 귀찮고 힘든 일이 있어도 힘을 내서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그 여행이 아무리 가혹한 것이었어도 나중에 남는 추억은 훨씬 더 멋있어진다. 이게 나의 철학입니다.”
(...)
흥이 돋지 않아 오가는 말이라곤 “춥네.” “참 춥네요.” “정말 춥네.” “정말, 정말 춥네요.” 정도였고, ‘이제 아무 데도 가기 싫다...어딜 가나 춥기만 하고.’ 라고 생각했다.
기억의 마법은 끔찍하고, 그리고 또 멋있다.
친구의 철학에 한표를 던진다.
요시모토 바나나 <매일이, 여행> 27p
일본의 문화를 조금씩 받아들이던 시기에 내가 처음 만난 일본 소설이자 가장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책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었다. 사실 일본어를 배우고 회화까지 어느 정도 가능했던 시기에도 일본은 알다가도 모를 나라였다. 언젠가 읽었던 책의 글에는 (책 제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 일본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청년에게 일본인 할아버지가 그의 자만을 일축하는 장면이 있었다. 당신은 일본인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이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고 그 당시에는 충격적으로 받아 들여졌나 보다. 십년 넘는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사는 이상 그들의 외부인 들을 향한 절제된 경계심이 지극한 예의로 가득한 문화로 발전하게 한 것을 안다. 예의 있는 행동을 하지만 그만큼 그들의 진짜 속내를 모르겠다고들 말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에 그들의 문화나 언어를 배우는 것이 막막해졌다. 하지만 사소한 것에도 그들이 담는, 그들만이 완벽히 이해하는 철학들을 동경하기도 했다. 에반게리온이나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그들의 삶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그들의 문학이 쉽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제 3국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만은 예외로 다가왔다. 그녀의 소설 <키친> 속 부엌에 쪼그려 앉은 여주인공의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다시 읽어야겠다. 너무 흩어져버린 기억 때문에 아쉽다.) 그녀의 글을 또 읽고 싶었다. 언젠가 부산 친정에 갔을 때, 모교 앞의 한 서점에서 산 <매일이, 여행>을 이제야 집어 들었다. 아마도 부산에 가는 것이 여행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이라는 단어에 이끌려서 카운터로 가지고 갔을 거다.
흔한 여름휴가를 가지 못하고 자체적으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에서도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을 내고 싶었다. <매일이, 여행>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다녀 온 나라들의 추억 한 조각씩 넣은 책이다. 너무 좋았던 곳, 혹은 그 장소의 이야기 보다 한 순간의 기억들을 소환해낸다. 일본의 원제목은 <人生の旅をゆく> (인생의 여행을 가다). 여행을 다녀온 것이 그녀에게 많은 시간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였다. 일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길게 미사여구를 늘여놓지 않아도 그녀의 글은 충분히 깔끔하고 담백하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단어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담백함’에 걸맞게. 하지만 그 안에서도 그녀는 충분히 위트 있게, 때로는 진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담아냈다.
여행의 추운 기억, 힘들었던 기억마저 끔찍했지만 멋졌다며 말하는 그녀의 단호함에 나의 언젠가 있을 여행을 생각한다. 아니, 미래를 그려볼 필요도 없다. 3년 전에 다녀온 비 오는 날의 일본 여행이 기억났다. 비가 내려 추웠고, 아이는 갑자기 열이 나기도 했고 나는 공항에서 심하게 넘어져 다치기까지 했던 여행이다. 하지만 그 여행이 아이에게는 또 다른 이야깃거리가 되어서 여전히 꺼내어보는 추억이다. 아이가 고른 미키 햄버거모양 가방은 여전히 아이에게 사랑받고 있다. 디즈니랜드에서 만난 인어공주는 공중에 떠다니며 노래하는 환상적인 모습으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인어 공주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비가 오고 힘들었어도 여행 마지막 날은 날씨가 좋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날이 지나고 나니 다시 이 조그만 아이와 여행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책의 한 부분이 3년 전의 더 어렸던 아이와 나의 모습을 불러왔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다. 더해서 그녀가 발 딛는 곳이 불러 오는 그녀의 이야기도 계속 듣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