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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Apr 15. 2021

이제, 앤 셜리는 어쩌면 롤모델처럼

루시 모드 몽고메리 - 에이번리의 앤


빨간 색 머리, 주근깨가 잔뜩 하얀 얼굴에 박혀있던 빼빼 마른 어린아이였던 앤 셜리는 어느새 처음으로 소중한 이의 죽음을 바라보게 되었고, 자신의 미래와 사랑을 고민하는 여인으로 자라있었다.


호기심이 가득했고, 자신의 생각, 의지들을 똑바로 설명하며 수많은 실수들 틈에서도 기죽지 않던 아이였다. 거침없는 행동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들과 호기심들로 마릴라와 린드 부인을 놀라게 하기도 했던 그녀는 이제 마릴라에게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보았던 앤의 모습은, 내가 하지 못했을 일들을 하고 질문을 하는 아이였다. 자연스럽게 앤을 통해 나는 나도 모를 통쾌함의 감정을 느끼곤 했다. 마릴라와 매슈의 너무 다른 모습은 앤의 행동에 방해가 되느냐 혹은 지지가 되느냐의 여부만 중요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녀가 열여섯의 나이를 지나기까지도 여전히 생각에 빠져 지내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절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녀를 지켜봐 온 이들의 무언의 응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무얼 하든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고 때로는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겉으로는 그 의견에 반하기도 하지만 '앤, 너라면'이라는 감정이 그녀를 지켜보는 어른들의 말속에 모두 들어있었다. 어쩌면 앤도 그것을 느꼈으리라 생각이 든다.


<에이번리의 앤>은 작은 꼬마 앤 셜리가 열여섯의 시절을 보내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앤의 두 번째 이야기다.

여전히 공상하기를 좋아하니 이야기의 시작 역시 계단에 앉아 생각에 빠진 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새롭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전혀 뜻밖의 이웃이 등장하며 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전의 이야기와 가장 다르게 느껴진 것은 그녀의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의 생각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그녀가 이웃 어른들과의 대화를 시작하였다는 점이었다. 마을을 좋게 만들기 위한 협회를 만들고, 이웃들의 대문을 모두 두드리며 그들의 생각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어른들은 그들의 모습에 믿음이 가지 않으니 때론 응원을 보내기도 또 때로는 무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그들의 노력이 닫힌 세대 간의 이야기에 조금은 물꼬를 트이게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가장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느꼈을 어린 소녀는 이제 다른 이의 생각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면서, 현명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길에 있었다.


내가 늘 겉으로는 미소 짓지만 속으로는 가슴 아픈 기억에 괴로워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조금 전보다 지금은 덜 흥미로울 거야. 그게 현실의 가장 나쁜 점이기도 하고 가장 좋은 점이기도 하단다, 앤.. 현실은 널 비참하게 내버려 두질 않아. 계속해서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애쓰게 되지. 불행해도 낭만적으로 살겠다고 마음먹더라도 말이야. 이 사탕 정말 맛있지 않니? 난 이미 너무 많이 먹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더 먹을 거야.

루시 모드 몽고메리 <에이번리의 앤> 312p


조금 더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빨간 머리 앤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빨간 머리로 시작한 앤은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의 모습으로, 지금까지의 편견을 조금씩 허물어뜨린다. 양 갈래로 땋아내린 어린 소녀였던 앤 셜리는 이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마릴라를 도와 쌍둥이를 돌보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숙해져간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사랑, 결혼, 중년의 다시 찾은 사랑들을 바라보며 그녀 역시 '사랑'이라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앤 셜리가 열여섯, 열일곱의 나이로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그 당시에는 그 순간의 시절에 이미 성인으로 대우를 받는 것이니 지금 시대의 청춘들을 생각하게 하였다. 너무나 불안해하며 이 시절을 살아가는 이들은 이 책을 보며 어떤 모습의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소통이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시대들을 향해 손 내미는 앤을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해졌다.


앤은 그날 밤 창가에 앉아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앤의 마음속에선 기쁨과 섭섭함이 한데 뒤섞였다. 마침내 앤은 난데없이 생각지도 못한 길모퉁이에 이른 것이다. 무수한 무지갯빛 희망과 미래를 가진 대학은 바로 그 모퉁이 너머에 있었다. 그렇지만 앤은 그 모퉁이를 돌아가려면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을 뒤에 남겨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단순한 일과 흥밋거리들은 지난 2년 동안 앤의 마음속에 소중하게 자리 잡았고, 앤이 쏟은 열정으로 그것들은 아름답고 기쁜 일이 되었던 것이다. 앤은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동안 앤은 학생들 모두를 아꼈으며 바보 같고 버릇없는 아이들까지도 사랑했다. 앤은 폴 어빙만 생각해도 레드먼드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에이번리의 앤> 352p


새로운 시작을 앞선 앤에게 지나온 시간을 다시 돌아보며 또 다른 삶을 상상해보는 모습이, 지금의 나도 한참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어떤 또 다른 길모퉁이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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