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키가 큰 뒷모습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와 그걸 바라보는 주디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있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내용은 이미 알고 있던 것(한 소녀가 고아원에서 신사의 후원으로 대학교에 다니게 되고, 그 신사에게 소녀가 보내는 편지들을 담은 동화)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지만 우리가 몰랐던 세계가 풍성하게 펼쳐져 있었다.
제루사 애벗이 '주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며 보낸 편지를 보면서는 앤이 자신의 이름에는 'e'가 뒤에 붙은 앤이라고 말하며 이름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 모습이 함께 겹쳐 보였다. 자연스럽게 서양 문학에서는 이름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심심찮게 발견했음이 기억났다. 이름은 개명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 부여되지 않고 오랫동안 우리 곁을 지키기도 한다. 이름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은 이들에게 있겠지만, 특히 앤이나 제루사 애벗 (주디)에게는 이름이 주는 의미가 컸을 거라는 데에서 멈칫하게 되었다. 부모로부터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그녀들에게 이름은 또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힘주어 말하고 강조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 되었을 거다.
주디란 이름이 훨씬 좋아요. 물론 엉뚱하긴 해요. 저랑 완전히 다른 아이한테 어울리는 이름이니까요. 가족한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응석받이로 자란 파란 눈 예쁜 소녀, 평생을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온 아가씨한테나 어울리겠지요. 하지만 제가 그런 소녀라면 정말 멋있지 않겠어요?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집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며 자란 탓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그런 체하며 사는 것도 재미있네요. 저를 부르려면 언제나 주디라고 불러주세요.
-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26p
우리는 이름을 둘러싼 우리의 이야기와, 주디의 마음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뜻밖의 질문이라서 놀란 듯도 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들여다볼 때 즐거워하며 봤던 장면은, 주디가 고아원에서만 지내다가 새로운 교육 환경에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그들의 일상적인 교육을 받아오며 알았던 문학 작품이나 작가들을 말할 때 주디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교실에 웃음이 터지게 만들었다. 주디는 본인의 현실을 분명히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의기소침하지 않고 문학 작품을 여러 권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다들 꿈에 빠진 시간에 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읽지만 그 장면은 목적을 금방 잊고 문학 그 자체에 빠져든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 정말 재미있어요! 저녁 시간이 되기만 온종일 고대하니까요. 방문에다 '공부 중'이라는 푯말을 붙이고 멋진 빨간색 목욕 가운이랑 솜털이 부숭부숭한 실내화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서 등에다 방석을 있는 대로 대고 팔꿈치 옆에 있는 학습용 청동 램프를 밝혀요. 그런 다음에는 책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요. 한 권으로 모자라요. 한 번에 네 권을 읽어요.
-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35p
자신에게 익숙했던 둥지를 벗어나 너무나 새로운 세계에 던져진 아기 새 같은 주디는 이 세계를 자신의 터닝포인트로 삼게 되었을 거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몹도 나무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두 다리는 세우고, 두 손으로 책을 잡고는 주디를 그려보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나는 하였던가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자신의 살아온 시간들 중에서 터닝 포인트라고 할 만한 시기들이었다.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뀌면서 놓인 자신의 달라진 생활들을 어떻게 또 이끌어갔었는지 말해 보며 웃음이 나기도 하고, 조금 더 자신의 예전 모습을 상기시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동화를 여러 권 읽어 오면서, 혹은 고전을 읽어오면서 우리에게는 늘 해결되지 않을 숙제 같은 질문이 있었다.
과거에도 해결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 생각들, 여전히 지금도 그런 모습들을 볼 때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혹은 책을 읽는다고 나아질 수 있을까요?
등등.. 여러 질문들은 늘 따라다니곤 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애서가인 나로서는 지금에서야 조금 더 나만의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있다. 문학 속 (혹은 동화나 시) 글들을 읽는다고 많은 것을 변화시키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책을 읽으며 우리가 공감할 수 있고, 이해받는 느낌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말이다. 동시에 오랫동안 묵혀 온 감정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상처보다 위안과 안도의 손길이 함께할 수 있게 돕고 있는 많은 것 중의 하나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애서가로서의 나의 모습을 벗어던지지 못할 것 같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접속하는 능력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어떤 것은 이해하고 어떤 것은 지루해합니다. 그렇지만 문장의 표현이 어떻더라도, 주인공이 누구더라도 그 안에는 인간적인 호소가 담겨 있기 대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려서는 어른들보다 그런 일들을 더 잘해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책을 읽을 때는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다시 귀를 쫑긋하면 좋겠습니다. '책 따위야 남이 지어낸 이야기인데.'하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 정혜윤의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