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 A가 X에게
그때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작 주변에 기찻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두려워졌어요.
한 칸 한 칸 지나가는 기차 소리. 나는 눈을 감았어요.
여객 기차가 아니라 화물 기차였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화차 지붕에 많이 매달려 있었어요.
눈을 감고 생각했어요.
지속되는 것은, 뭉슨 일이 있어도 사랑을 할 때만은 승자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알아보는 여자들과,
함께 겪었던 패배 덕분에 서로를 명예롭게 생각하는 남자들이죠.
그게 오래 지속되는 거예요.
존 버거 <A가 X에게>
얼마 후, 손 그리는 법을 설명한 책을 발견하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살펴봤어요.
그리고 사기로 결정했죠. 마치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같았어요.
모든 이야기는 또한 손의 이야기니까.
집어 들기, 균형잡기, 가리키기, 합치기, 주무르기, 헤쳐 나가기, 쓰다듬기,
자는 동안 내려놓기, 자르기, 먹기, 닦기, 연주하기, 긁기, 쥐기, 벗기기, 짜기,
방아쇠 당기기, 접기.
책의 각 페이지마다 서로 다른 행위를 하고 있는 손 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요.
(...)
지금 당신을 만져 보고 싶어 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너무 오래 당신을 만져 보지 못해 이젠 쓸모없이 되어 버린 손처럼 보이네요.
존 버거 <A가 X에게>
지속되는 것이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어요.
아이다는, 전쟁이 끝난 후의 여자들과 남자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네요.
만나지 못하는 연인을 향한 마음과,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말하고 있지요.
나에게 보이는, 지속되는 것이 무엇일까 한참 생각하는데 이렇게 떠오르지 않을 수가 있나 싶습니다.
그리고 손의 이야기는, 읽고 여러 번 또 읽기도 했죠.
저는 제 손이 예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손을 소중히 대한 적이 없었어요.
조금만 글을 써도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고 빨개지는 부분 보면서 괜히 핀잔을 주고 싶어지기만 했을 뿐.
그런데 손이 우리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니. 사진처럼, 이 글 아래에 손 그림이 그려져 있어요.
이 손 그림을 한참 보았습니다. 정교하다기보다는 야위어 보이는 손인데 펜을 쥔 손가락에는 절실함이 느껴지더군요.
(그림은, 보는 사람의 감정과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겠죠?)
내 손도 한 번 들여다보고 책 속의 글을 또 한 번 읽어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요즘 더욱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죠.
전, 어떤 의무감에만 얽매이고 싶지 않은 것은 분명해요. 짓누르고 있는 많은 외부의 요인들이 저를 결정짓고 휘두르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것.
소중하게 쥐었다가 다시 힘을 빼면 빠져나가는 것을 다시 쥐어보고 싶은 것.
어떤 정확한 정답을 언젠가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찾아가는 과정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일 거라 믿어요.
책들마다, 좋은 책인데도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책은 얼른 뒤로 넘어가서 읽어보고 싶은,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책은 마지막 장이 넘어올까 봐 두려워지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책은 한 문장에 막혀서 뒤로 차마 넘어가지 못하기도 하고.
이런 책도 있어요.
너무나 부드러운 말속에 숨은 공허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또 너무 다정함이 느껴지는데
그 글과 동시에 현실의 비참함이 느껴져서 마음 한구석이 자꾸 아리기도 하게 하는 책.
분명 저는 아이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안타까움에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읽고 있는데
그녀의 글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 문장도 놓치기 싫은 걸 느낍니다.
얼른 마지막 장을 덮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느리게 읽고 싶은데, 이 문장을 계속 만나고 싶어서 멈추기 싫은.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