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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Apr 26. 2020

삶에서 나를 길어올리는 것

라문숙 <깊이에 눈뜨는 시간>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게 많은 세상,
미처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일상이 버거울 때가 왜 없을까?


꽃은 두어 달이 넘도록 자신을 지키다가 꽃잎 하나도 떨어트리지 않은 채 서서히 시들었다.

이제는 그만 떨어져도 좋겠다 싶어 빛이 사라져버린 꽃송이에 손을 대는 순간,

꽃이 야무지고 딱딱한 씨앗을 남겼음을 알았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점점 여물고 단단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만은 아닌 걸 크리스마스로즈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라문숙 <깊이에 눈뜨는 시간>


우연히 펼쳐들었던 책에서 온 마음을 빼앗기는 경험을 또 했었고 온전히 제 시간을 갖기 힘든 나날들이 이어지면서 또 찾게 되었어요.

많은 이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고 그 생각대로 건네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생각했지요.


저도 다시 읽었는데 이번에는 더욱더 힘을 빼고, 필사를 해야지 하는 생각에서 오는 어깨 힘 들어간 모습에서 벗어나,

한 장 한 장 넘기며 조용히 작가님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죠.

저보다 조금 더 시간을 보낸 이에게서 듣는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책은, 총 3가지 이야기 속에 잔가지들이 드리워져 있는 듯합니다.




삶의 단순한 리듬을 찾는 시간, 

오랜 시간을 보내는 집에서. 부엌에서. 서재에서. 일상의 모든 시간들에서 그저 시간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잘 살아내려 했던 그 마음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들을 전하고 있죠. 

우리 집을 계속 두리번거리며 여러 번 둘러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좀 더 나은 구석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공간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왔었는지 나의 시간들이 그저 흘러가기만을 바랐던 만큼 

이 공간들이 저에겐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네요. 

작은 공간인데 저의 취향이 조금씩 생기면서 기존의 모든 모습이 지우개로 지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하였고 

요리는 도저히 못하겠다며 손 놓기도 한 순간들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제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라버리고 말죠. 

그런데 이제서야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막막해지고 답답해진 순간이 지나자 

금방 이 집의 모든 공간에 발걸음을 더 하고 싶어지고 그냥 스쳐보내고 싶지 않더군요. 

아이가 엄지 척 올려주는 요리를 해 주고 싶어지고 하루 세 번 설거지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아이와의 시간이 더해지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편안해져서 금요일에는 함께 뒹굴뒹굴, 

몸이 체력의 한계를 느끼더라도 웃으면서 함께 몸을 눕히고 놀았네요. 

모든 것에 완벽히 시간을 정하여두고 계획대로 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대로 어느새 움직여지는 순간에 느껴지는 더 큰 만족감을 모른척하기 싫어요.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나만의 리듬을 찾는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으로도 의미 있는 날들이겠죠.




읽고 쓰며 나 자신이 되는 시간

작가의 글들이 지면을 채우게 되는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괜찮을 거라 믿던 시간들을 지내오던 그녀가 친구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찌르르 해지는 순간에 저도 동시에 찌르르합니다.

모호했던 감정이 문장이 되는 순간들, 감정의 정체가 드러나고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며 지난해 보이는 시간들 속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과 엮여있고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홀로 동떨어져있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 외롭게 느껴지던 순간이 많았는데 그 순간을 다시 돌이켜보기도 합니다.


"하루, 때로 며칠 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감정들을 한바탕 쓰고 나면 삶과 내가 다시 보인다. 그렇게 조금씩 느긋해지고 단단해진다. 글쓰기가 주는 선물이다." - 라문숙 <깊이에 눈뜨는 시간> 


몸은 몸대로 체력이 바닥나고 나의 모든 가능성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을 때 주저앉아버리고 싶었습니다. 

써야 해서, 써야 할 것 같아서 책에서 찾은 문장을 쓰고 한 마디. 조금씩 보태봅니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의 이 표현이 너무나 사소로운 것은 아닐지, 나에게 의미 없는 시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나더군요. 그런데 손이 키보드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익숙해질 즈음 글은 마지막을 말하고 있었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

한 쪽에 웅크리고 있던 감정이 말랑해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대단한 글을 쓴 것도 아닐 테고 저의 삶에서 큰 변화를 주는 순간이 아닐 텐데도.

그런 순간이 느껴지는 날 올까 했는데, 오기도 하더군요. 


삶과, 나의 생각들을 다시 모으는 순간. 조금씩 더 느긋해지고 단단해진다는 것을 믿는 순간 이미 글을 쓰는 행위는 선물일지 모릅니다.




좋아하는 곳에서 힘을 모으는 시간


작가는, 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보이는 마당에서 힘을 모읍니다. 심지어 마당 뒤 소홀한 시선에서 보이는 작은 풀들조차 허투루 볼 수가 없습니다.

공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만큼, 숨통을 트이는 공간이고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녀에겐 힘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이겠죠.


"가을인가 싶었는데 여름 못지않게 덮고 한여름에 긴 옷을 찾을 만큼 서늘한 밤도 있는 걸 잊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사는 건 원래 그런 모습이라고, 누구나 서툴고, 실패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며,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겁낼 필요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없다.

나는 언제나 진심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다하는 게 최선이라는 말만 겨우 할 수 있으니 사프란 구근에서는 사프란이 싹트고, 개양귀비 씨앗에서는 개양귀비 싹이 나온다는 소박한 믿음에 이토록 매달리는 걸까?" - 라문숙 <깊이에 눈뜨는 시간>





저도 제 공간을 다시 둘러보고, 다시 책을 펼쳐보고 노트를 펼쳐봅니다. 빈 페이지가 더 많은 노트를 한 장 두 장 차르륵 넘겨보기도 하고 종이 질감을 만져보기도 합니다. 


누구나 서툴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겨우 한다고 하는 문장에서,

도리어 저는 희망을 발견하고 미소를 짓습니다.


**다음 발행은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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