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감수성은 갈수록 높아만 지네.

by 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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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자주 하늘을 올려보는 계절이 있어요.

그토록 좋아하는 겨울도 아니고,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어나는 봄도 아니고

낙엽과 은행나무 잎이 예쁘게 물들어가는 가을도 아니고

너무나도 제가 힘들어하는 여름이죠. 늦봄에서 초여름. 혹은 여름의 중순과 늦여름까지도.

사실 저는 초록색을 아주 싫어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초록색 안에서 마음이 한없이 무장해제되어버리곤 합니다.

내 안에 숨어있던 '초록 감수성'이 폭발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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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미 찍어버린 후의 사진에선 늘 조금씩 더 밝아 보이는 초록인데

전 조금의 진한 초록빛을 좋아해서 햇살을 다 가리고도 조금씩 햇살이 틈새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초록이 더 짙어진 초록으로 되는 순간의 그 색깔을 딱 좋아해요.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꼭 지나게 되는 작은 산책로가 좋아서,

아파트 단지의 중간중간을 지나면 크게 자라서

여름에는 저절로 수목원을 지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청명함이 좋아서,

여름에 비가 조금 내리고 난 후

약간의 습기를 머금고 있는 나무들 아래를 지날 때 들리는 새들의 소리와 찰박거리는 걸음 소리가 좋아서,

여기 이곳에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아이와 3년 동안 유치원을 가는 길목에는 이런 긴 보도를 둘러싼 나무가 우리를 바라보곤 했죠.

유난히 큰 나무가 드리워진 장소에선 우리만의 '미니 숲'이라며

한여름에 그늘의 선선함을 느끼며 천천히 걷기도,

혹은 가랑비가 내리는 날에도 꺅 소리를 지르며 내달려보기도 했고

햇살이 살짝살짝 비치는 것을 보며 진해진 나뭇잎을 올려다보곤 했었는데.

유치원을 졸업하고 제일 아쉬웠던 것은 그 미니 숲을 예전처럼 지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더욱 그냥 초록을 가진 사물들은 눈을 즐겁게 하고

그 영향은 제 감정으로까지 세심하게 들어와버립니다.

책 속에서 초록을 발견하면 멈추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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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꿈도 꾸지 않았던 반려 식물을 키운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용기를 내기도 했고 말이죠.

'초록감수성'은 더해지면 더했지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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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작은 꼬마 아가씨의 영향이 큰 것이겠죠.

초록이 짙은 곳에서 유독 아이는 더 밝게 웃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이는 더 빛나 보였고 아이의 그 모습이 좋아서 초록 앞에서,

초록 아래에서 아이를 멈춰 부르곤 합니다.


너무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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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래고 닳아버려서 지금은 없는 초록색 신발이 이맘때, 이 계절에는 그렇게나 생각이 나고 보고 싶어집니다.

아이가 아주 어린 시절 이 신발을 신고 마음껏 따라다니고 마음껏 어디든 다녔는데 말이죠.

초록은, 아이의 밝은 모습. 저의 마음 속 메마름에 물기를 머금게 해 주는 감정의 오아시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 어린이 날이지만 어딘가로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오랜만에 아파트 단지의 숲으로 잠시 다녀올까봐요.

오늘 글 적으며 그리웠던 초록색에 인사도 전했으니 제 기분은 또 행복해졌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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