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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Jul 26. 2020

분위기에 젖어들고 만다

나혜석 / 꽃의 파리행

"자작나무의 삼림 위에는 석양이 냉랭했다. 왼편 하늘빛이 황색으로 되었다가 진홍색으로 변하더니 청회색으로 변한다. 하늘은 확실히 둥근 형상이 보이고 밤낮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늘은 거울같이 투명하고 황홀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가진 형상이 다 보였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든 오로라다."

-29p

"기차는 두 시간 동안이나 호수에 달릴 듯한 호변으로 질주하는 데 따라 이상하게 생긴 봉우리가 출현하고 괴암 출래하여 청산 백수 진할 곳 없음을 못내 기뻐하였다. 때는 마침 석양이라 이어져 있는 봉우리는 백옥같이 희고 깨끗한 눈이 남아 있어 자색, 혹은 청색, 혹은 적색으로 변화한다. 보는 동안에 연기 같은 운무로 싸여버리고 갈 길을 바삐하는 범선이 노질을 애쓴다. 난간에 한 줄기 낚시를 던져 놀고 앉은 맑고 아름다운 청진한 풍광은 실로 선녀가 놀을 자리라 할 만하였다. 오후 7시에 인터라켄에 도착하였다." - 48p

-나혜석 <꽃의 파리행> 



보름산 미술관에서 빵 냄새에 취하며 나혜석과 오래전 먼 곳으로 떠났다.

그냥 줄만 긋기 아쉬운 문장들을 연필로 종이에 옮겨 담았다. 연필이 너무 부드러워서 흑심이 다 사라질까 두려워 힘을 세게 주지도 못하며 살살 옮겨 담았다.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는 음악소리에 묻히지만 대신 손으로 온전히 전해졌다. 

연필이 종이를 지나가는 소리가. 

여행기라는 것을 알고 읽기 시작했다. 조선 여인, 나혜석의 눈에 비친 서양의 모습들을 담고 있었다. 알면서도 순간순간 여행기라는 생각을 잊기도 했다. 아마도 여행기로만 그치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거다. 자유분방한 서구 여인들의 모습을 보며 조신 여인들에 대한 연민과 애처로움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낯선 이들의 사는 모습과 그곳의 풍경들을 이야기하면서 그저 감정에만 기대지 않는다. 지리와 역사를 함께 살피는 진중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영민함과 이성적인 모습만을 드러내지 않고 절경을 만나서는 그 풍취에 취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보여준다. 헤이그에서는 역사를 이야기하며 역사 속 그(이준)의 부인에게 엽서를 보내는 다정함까지 보인다. 그녀의 글이 가진 힘은 솔직함과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감정이 드러나게 한 '적당함'을 가진 것에서 오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에게 이 책은 '나혜석'이라는 여자를 발견하게 한다. 아직 남은 뒷장들이 쉽게 넘어가서 읽을 페이지가 적어지는 것이 아쉽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만나는 순간은 글쓰기 선생님을 만난 기분이 들어 몇 번이고 문장을 되새겨 보게 된다. 밑줄 그은 것은 여러 번 되돌아가서 읽어 보게 되니 한 권 읽는 것이 더디다. 글쓰기 모임이 끝나고 난 후의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더디면 어떤가싶다. 한 권이 온전히 내 안에 들어오는 그 가슴 벅참을 몇 번이고 만나고 싶을 뿐이다. 이 책도 그런 책으로 내 앞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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