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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Sep 01. 2020

결혼 5년 차, 아직 딩크인 이유

낳지 않는 것도 사랑이니까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근심



너무 많이

사랑하니까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의심들이 있다. 거둘 것처럼 단호하게 생각해버렸다가도 이내 정말 마무리 지어도 되는지, 결정을 정말 내려도 되는지 의심이 든다.


 언제부터였을까. 침대 위 내 옆자리에 누군가가 항상 같이 잠들기 시작한 이후였을지, 또는 그 누군가와 처음 손을 맞잡았을 때부터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본디 상상이라는 것은 눈을 감은 채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데, 그것만은 두 눈을 모두 뜬 채로 상상하게 된다. 옆자리에 넋을 온통 꺼내놓은 채로 잠든 남편을 구경할 때나 논쟁의 여지없이 해사한 웃음을 짓는 남편의 얼굴을 볼 때. 서로의 무르팍 높이에서 겨우 걸음을 떼는 소중하고 작은 존재를, 키만큼 조그마한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어떤 젊은 부부를 지나칠 때. 그 부부의 모습에 비해 단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가족’이라는 것이 조금 작고 허전하게 느껴질 때. 앞으로 우리에게 더 많이 생길 것이라곤 그다지 많지 않을 금(金)과 얼굴 위 눈금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그렇다.




 생의 아름다운 것들을 떠올려본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처음 땅을 두 발 딛고 일어섰을 때, 공부했던 것만큼의 성과가 나오던 시험지를 붙든 순간, 좋아하던 남자애가 먼발치에서 걸어오기 시작할 때 나는 아마 기뻤을 것이다. 하늘의 구름이 말도 안 되는 모양으로 아름다울 때, 봄볕에 돋아나는 새순의 연둣빛이 너무나도 영롱할 때, 경이로운 예술을 접할 땐 형언조차 어려울 감동에 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의 두근거림, 안정적인 단계에 돌입한 연인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한 온기,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누군가의 노랫소리, 목소리, 눈으로 여러 번 곱씹어보게 되는 정갈하고 따스한 문장들…….


 삶이 이토록 좋고 아름답고 따뜻한 것으로 가득 채워진 것이었다면 나의 결정은 조금 쉬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얼마간의 고민 후에 금세 결단해버렸을지도 모르지. 안타깝게도 생은 아름답지 않은 것들로도 가득 차 있다. 매년 더 뜨거워지는 지구,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사계절, 너무 덥거나 메마른 여름,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매일 더 비교하기 쉬워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간들, 더 정교해지는 언어폭력, 사라지지 않는 갖가지 차별. 기술 발전이 유도하는 윤리와 존엄성의 붕괴, 한계에 다다른 듯한 지구에서 토해지듯 뿜어져 흩어지는 미세먼지 같은 것들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 2020년을 뒤엎어버리고도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는 오늘의 전염병이 앞으로 언제 더 거센 형태로 다시 걸음 할지도 미지수다.


 삶만큼이나 둥글고 입체적인 이 지구에서, 좋은 일들만 골라 취할 수 없는, 촘촘하게 박힌 우연성을 뚫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는 자라나야 한다. 때론 웃고, 때론 가슴 아파하고, 희망을 품었다가 곧잘 절망하기도 하며 빼곡하게 들어찬 하루하루들을 통과하며. 비교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피하려 해도 보이는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삶을 못 본체 못하고, 노력을 해도 닿을 수 없는 꿈과 현실의 괴리에 자주 빠지며.


 ‘복지’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명사] 행복한 삶.


 정의를 알고 다시 바라보는 ‘복지’는 뒤에 ‘정책’이라는 말을 숨긴 채 일상에서 쓰이는 듯하다. 맛있는 밥이 최고의 복지, 칼퇴근이 최고의 복지라고 할 때 맛있는 밥이나 칼퇴근 자체가 행복한 삶은 아닐 테니.


 복지, 행복한 삶. 행복한 삶, 복지. 여러 번 되뇌고 나서 마음이 기우는 결론에 닿는다. 태어나지 않은,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이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아기를 위해서는 낳지 않는 것이 아이를 위한 복지일 수 있다고. 만나지 않는 것이 내가 선보일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일 수 있다고. 단 한 줌의 의지도 욕심도 없이 태어날 아이의 행복을 지켜줄 만큼 강하고 담대한 엄마가 될 자신이 내겐 없으므로. 나의 연약한 아이가 자라기에 세상은 때론 너무도 난폭하고 무자비하므로.            


 분명 나는 그 아이를 너무 사랑하겠지만.

 지금도 너무 보고 싶지만.




* 아이를 가지기로 결정하여 임신~출산~육아 중인 모든 엄마아빠들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은 당연히 하고 있다. 낳는 것 역시 최대치의 사랑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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