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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Mar 02. 2021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하는 이유

번복의 미학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충일감



번복의

미학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의심들이 있다. 거둘 것처럼 단호하게 생각해버렸다가도 이내 정말 마무리 지어도 되는지, 결정을 정말 내려도 되는지 의심이 든다.

 글을 쓰면서 이런 얘기는 조금 우습지만 글쓰기는 좀 피곤하다. 특히 에세이를 쓰는 건 더 그렇다. 글을 쓰게 되면 글로써 불러오고자 하는 시간만큼을 되살려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살아내야 하니까. 어둡거나 암울했던 인생의 장면들을 글을 쓰면서 반추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곱절로 괴로워지는 순간들도 많다.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어느 날에 대해 쓸 때나 직장에서 처음 성추행다운(!) 성추행을 당하고 느꼈던 불쾌함, 그 속에 기이하게 얽힌 감정들에 대해 글을 쓰며 회고할 때도 그랬다.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에 관해 말할 때도, 좋아하는 사람과 아프게 맞닥뜨렸던 순간을 회상할 때도 그랬다.

 피곤하면 그만두면 되지. 글 같은 거 안 쓰고 그냥 희희낙락 놀기만 해도 인생은 짧을 텐데, 싶기도 하다. 인세로 돈 벌어 입에 풀칠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글을 쓰고 앉아 있을까. 인생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어서? 이것도 물론 맞는 말이다. 글을 쓰려면 인생의 복기를 부단히 거듭해야 하고, 겪어낼 땐 몰랐던 순간을 재발견하기도 하니까.


 몇십 권의 책을 낸 작가는 아니지만, 꽤 꾸준히 인생의 조금씩을 할애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은 글쓰기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인생과 달리 수정, 즉 퇴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번복의 부정적인 뉘앙스들을 글쓰기에서만큼은 잊어도 좋다. 내가 썼던 문장을 번복하면서 더 나빠지는 글은 없으니까. 적어도 내가 쓴 글에서는 내 문장을 다채롭게 번복할수록 글이 더 매끄러워졌다.

 주술 호응이 되지 않는 문장의 구조를 다잡는 기본적인 번복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 한 번 다시 읽으며 불필요한 부사를 뺐다가, 부사가 없던 문장에 단 하나의 부사를 넣어 글의 톤을 바꾸어본다. 어떤 사실에 대해 경과만을 서술했다가 소감을 같이 덧붙여본다. 거의 완성이 다 됐다 싶을 때는 소리 내어 입으로 낭독해본다. 과하게 호흡이 긴 문장을 과감히 쳐낸다. 글이 조금 더 산뜻해진다.


 삶은 조금 퍽퍽하고 때로는 고단하고, 무엇보다 불가역적이어서 고통스럽다. 학창 시절 나를 괴롭혔던 애들한테 나는 영영 꿀밤 한 대 쳐볼 수 없고, 우리 엄마의 늙어가는 얼굴에서 주름 한 줄도 빼내 줄 수 없다. 그때 안 만났더라면 좋았을 사람을 안 만난 셈 칠 수 없고, 나를 그때 싫어했던 그 친구는 지금도 나를 싫어할 것이다.

 글에서라면 상황을 조금은 재편할 수 있다. 못해본 말들을 한 것처럼 끼워 넣을 수도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도 글을 쓰면서 새롭게 떠올려낼 수 있다. 내가 썼던 문장들을 부러뜨리고 다시 지어 올리면서 나는 지나온 모든 일들이 그다지 비극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한다.


 마음이 요동치거나 너무 침잠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글쓰기를 권하고 싶다.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이 절망적일 때, 내가 내 인생의 작은 부분이라도 고쳐볼 수 있다는 사실은 때때로 크나큰 위로가 되니까. 번복할수록 나아지는 무엇이 내 인생에 존재한다는 것도.


 미천한 나라도 그 증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글을 쓴다. 조금 모자란 글이 되겠지만 상관없다. 오늘의 글을 내일 번복하며 모레의 나는 더 나은 문장을 쓸 테니까.



태재 작가님과 함께하는 Essay Drive를 통해 쓴 글입니다. 이번 글의 글감은 ‘번복’이었습니다 :)


+ 충일감(마음속이 가득 차는 듯한 뿌듯한 느낌)이라는 좋은 단어를 알게 되어 매거진에 다시 이 글을 수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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