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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Nov 12. 2021

미치광이처럼 빈틈을 메워야

《우리도 사랑일까》를 보고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수수로움*



미치광이처럼

빈틈을 메워야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서 주로 줄거리를 잊어버리는 편이다. 때로는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어라? 저 사람 언제 저기 나왔더라? 저 사람 극 중 이름이 뭐였지? 아 그래서 그때 그 영화 어떻게 끝났었더라?

 어떤 영화는 해피엔딩이나 새드엔딩으로, 또 어떤 영화는 열린 결말의 아련한 잔상만으로 기억되기도, 드라마틱한 미장센으로만 머릿속에 남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사랑일까》는 반복적인 대비로 끊임없이 메시지를 환기하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스포일러가 대거 등장할 것이므로 언젠가 깨끗한 도화지 같은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아쉽지만 여기서 이별합시다.     


 아내인 마고는 사랑하는 남편 루와 놀라울 것 없는, 예측 가능한 평온한 일상을 산다. 둘 사이에는 둘만이 아는 맥락의 기괴한 말장난도 있고, 마고는 루의 가족들과도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린다. 루는 마고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신한다. 마고의 일상 속 우물에 돌멩이를 던질 대니얼이라는 남자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긴 영화를 짧게 추려드리겠다. 이런 무탈한 마고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남자 대니얼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고, 마고는 대니얼에게 흔들린다. 동시에 대니얼도 마고를 열심히 흔든다. 마고는 자신을 촘촘하게 흔드는 대니얼의 진동을 끝끝내 모른 체하지 못하고, 결국 루에게 이별을 고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대비를 앵글 안으로 들이며 마음을 철렁하게 한다. 마고가 다니던 수영장에서 샤워할 때는 온몸이 주름으로 가득한 할머니들의 나신裸身에 이어 비교적 젊은 마고 무리의 몸을 비춘다. 마고가 떨리는 마음으로 대니얼과 함께 탔던 놀이기구에서 얼굴 위를 연신 일렁이던 노을에 이어서는 파란 달의 빛깔을 닮은 조명이 노래 한 소절이 더 반복되기도 전에 멎으며 찾아오는 일순간의 정적을. 그 대비가 강렬함 만큼 그 정적이 주는 현실감은 도망칠 수도 없이 아찔했다.

 새로운 것은 모두 헌 것이 된다오, 지금 뜨거운 그 사랑도 나중엔 식을 거고 지금 식어 있는 그 사랑도 처음엔 다 불타듯 뜨거웠다오. 영화 초입에 등장했던 마고의 권태로운 얼굴과 여전히 권태로움이 떠나지 않는 마고의 얼굴을 수미쌍관으로 잡으며 감독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생엔 원래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메꾸면서 살 수는 없’다고 말하는 루의 가족이자 마고의 친구 제랄딘의 대사를 영화의 핵심처럼 배치한 것도 같은 이유일 테지.     




 영화 초반부부터 복선처럼 보여주는 장면 중에는 마고가 샤워를 할 때 파이렉스 계량컵에 물을 담아와 허공에 뿌려 장난을 치는 루의 모습도 있었다. 영화의 중후반부, 마고가 모든 것을 고백하고 샤워를 할 때 루가 다가와 예의 그 장난을 친 후에 샤워 커튼을 걷어내며 복선이 회수된다. 슬픔으로 짓이겨진 채 루가 평생의 장난을 엉망이 된 얼굴로 고백할 때에야 나는 이 장면을 책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려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이보다 더 극진한 사랑 고백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뒤이어 이런 절절한 고백을 하는 루를 두고 떠나는 마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도 했었지.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했다. 내가 마고였더라도 대니얼에게 꼭 한 번은 제대로 흔들렸을 것이고, 나를 다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안다고 자신했던 루를 언젠가는 떠났을 거라고. 안온한 사랑은 안주하는 사랑이 아니니까. 어쩌면 그냥 미치광이처럼 빈틈을 메우며 사는 게 좀 더 내 입맛에 맞는 모양이다. 거듭되는 작은 상처는 천천히 균열을 만들어 사랑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키고 말았을 테니까. 마고에게 필요했던 건 평생의 장난을 고백하는 몇십 년 뒤의 루가 아니라 오늘 당장 밀알만큼의 사랑을 실감하게 하는 루였을 테니까.


 어딜 둘러봐도 내게 대니얼 같은 사람이 생길 구석이 없으니 지금은 걱정일랑 다 집어치워도 되겠다. 오늘 밤은 그저 나의 루와 함께 요일제 분리수거에 나서야지. 안주한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꼼꼼히 손을 붙들고서.




* ‘마음이 서글프고 산란하다’는 뜻입니다.

** 본문에 등장한 책은 김민철 작가님의 《하루의 취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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