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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Nov 19. 2021

히든 피겨스

존재함으로써 대상을 숨기는 어떤 단어들에 대하여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애석함



히든

피겨스


 기억력이 최대치로 가동되어 옷차림부터 그날 먹던 것까지 떠올려낼 수 있는 날이 있다. 청록빛이 도는 니트에 스키니진. 짙은 갈색으로 염색했던, 컬이 있는 긴 머리칼. 꽤 걸어야 했음에도 굳이 골랐던 굽이 조금 있는 검은색 부츠. 노을이 어슴푸레하게 사라지고 거뭇한 어둠이 돋아나는 좁다란 길. 계동에 있는 책방무사를 가는 길이었다.


 그날의 이벤트는 ‘여성시인 낭독회’로, 신청자 대여섯 명이 모여 각자 여성시인이 쓴 시를 낭독하고 소감을 나누는 자리였다. 신청한 이유는 별것 없었다. ‘흠모하던 요조 언니를 직접 만나 같은 공간에서 시를 낭독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가 전부였다.

 부끄럽게도 우리 집엔 여성 시인의 시집 같은 건 없었다. 함의를 가진 단어들과 문장이 간결하게 종이를 가로지르는 시집 앞에선 어쩐지 쭈뼛거리게 되곤 했으니까. 원형으로 둘러앉은 우리에게는 곧 시집을 고를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그곳에서 제목이 눈을 이끄는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하재연’이라는, 누가 보더라도 여성일 듯한 이름을 가진 시인의 것이었다. 골랐던 시집에서 낭송할 시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단숨에 와닿는 감상이 있으면서도 너무 쏟아내듯 말하지 않는 시*를 택했다. 서로의 시를 듣고 나의 시를 읽으며 나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시를 나누는 사이, 호스트 요조 언니는 이 자리를 만든 이유에 대해 말해줬다.

 문학계에 드러나지 않은, 시를 쓰고 있으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여성 시인들이 너무도 많다고. 흔히들 떠올리는 시인들의 이름이 모두 남성의 것이어서, 이런 자리를 통해 여성 시인들의 시를 소비하고 또 알아가고자 했노라며. 시를 실을 지면을 얻는 데도 바쁜 어느 여성 시인들의 삶에는 남성 문인들의 성희롱이나 성추행에 대항하는 일 또한 과제처럼 주어지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자리에서였다.


 어떤 단어들은 존재함으로써 대상을 숨기기도 한다. ‘여류’라는 단어가 그렇다. 반대로 어떤 단어들은 부재함으로써 존재를 드러내고 보호하는데, ‘남류’라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방증이다.

 여류 시인, 여류 문인, 여배우, 여직원, 여고생, 여대생……. 갸웃거릴 틈 없이 자연스레 내뱉어지는 그 단어들 사이에 가려진 채 위협받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사무실에서 똑같은 동료의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는데도 어느 남자 부장님의 전화 통화에선 ‘우리 여직원’이 돼버리기 일쑤였던 나의 신입사원 시절에 대해서도. 종종 의문이 되었다가 이따금 분노로 번지곤 하던 그런 순간들을.


 매일 아침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는 나의 반려자 친구에게서 언젠가 ‘네게 존재하는 수많은 분노의 시발점은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들여다보는 너에게 있을 것’이라는 지적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맞는 말이기도 했으나 자격 미달의 발언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우리 남직원’이라고 불릴 일이 거의 없었을 테니까. 그의 직업이 시인이었다면 우리 사회는 마땅히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 대접했을 테니까.


 올여름께부터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프로그램의 엄청난 흥행과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그램이 남성 댄서들을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면 제목은 그냥 〈스트리트 파이터〉였을 것이란 누군가의 추측은 꽤나 쓰라렸다. 우먼, 여류,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가리고 지우고 있는 걸까.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그저 어떤 명사로 치환된 채였을까.


 그런 의문이 들 때면 가끔 계동 책방무사로 접어들던 좁다란 길을 다시 걷는 상상을 한다. 옅은 노란빛 조명이 따스하게 감돌던 다락처럼 좁은 책방에서, 모두 이름을 처음 듣는 시인들이 썼던 시였지만 저마다 다 다른 이유로 좋았던 그 시들의 제목을 톺아본다. 이런 생각을 글로 쓰고 있는 지금의 내게도 그날 같이 시를 낭송하던 그 자리 여성들과 나눴던 온화함이 응원으로 깃들어 있을 거란 확신을 한다. 선명히 기억나는 내 삶의 어느 날이 시로 점철돼 있다니 퍽 낭만적이라고 웃어보며.




* 그날 읽었던 시는《라디오 데이즈》라는 시집에 수록된 〈나만의 인생〉이었습니다.


_ TMI: 커버로 쓰인 사진의 상단 좌측에 손 올리고 있는 사람이 나 ~_~ 아마도 내가 고른 시에 대해 감상평을 말하고 있을 때 찍으신 사진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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