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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Nov 22. 2021

엄마를 부탁해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두려움



엄마를

부탁해


 엄마가 이상해졌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늘 엄마와의 시간을 불편해하는 내게 요즘의 엄마는 특히나 불편하다. 명절이나 계절에 한 번쯤 본가에 갈 일이 생기면 꼭 내 방에 있는 모든 짐을 묶어 놓은 꾸러미들을 가져가라고 연신 타박을 해댄다. 어차피 집에 가져가나 본가에 그대로 두나 들춰보지 않는 사진이나 CD 같은 것들이 갑자기 소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 텐데. 지난 설에는 엄청난 성화에 못 이겨 내가 쓰던 방 책장에 들어차 있던 학교 앨범들과 상장, 먼지 묻은 CD 꾸러미 같은 것들을 한 짐 지고 상경해야만 했다.


 언제부터 엄마가 이상해졌는지 생각해보니 짚이는 날이 하나 있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날. 내 인생에 살아 있는 할아버지는 없게 된 날. 엄마가 아빠를 잃어버린 날.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는 내 생애 죽음을 가장 가깝게 느꼈다. 고인을 깨끗이 닦고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염하는 곳에서는 특별히 더. 몸에 온기라곤 없어 보이는, 나무같이 말라가는 할아버지의 몸을 가운데 두고, 마지막으로 고인과 인사를 나눌 가족들이 할아버지를 에워쌌다. 그때만큼 죽음이 또렷하게 보인 적도, 동시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도드라지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활기를 완벽히 잃은 할아버지의 몸을 오가는 염사의 손길에 탄생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선 생과 사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마냥 바쁘지도, 마냥 슬프지만도 않던 장례식장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장녀로서 할아버지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엄마는 상주가 될 수 없구나. 우리 아빠가 돌아가시면 나는 어떤 기분이 될까. 장례식장에 가볼 일은 생길까. 엄만 어떤 기분일까. 가족이 사라진다는 건 마음에 어떤 구멍이 생기는 일일까. 우리 없을 때 집에 혼자 남은 엄마는 할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게 될까. 엄만 가뜩이나 눈물이 많은데.

 걱정했던 것보다 엄마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갑자기 정신이 반쯤 나간 것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었지만, 곧 제정신을 찾았다. 상례를 치른다는 것 자체가 K-장녀 엄마에게 너무도 많은 일감을 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으면서도 그 일을 수습할 일감으로 대하는 장례식장의 무수한 사람들과 부딪치며 수차례 의사결정을 도맡아 했어야 하니까. 비감에 잠길 여지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죽음은, 할아버지를 보내드린 그 날보다 그 이후의 엄마에게 남긴 여진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본가에 갈 때마다 조금씩 이상하게 구는 엄마를 볼 때면 늘 그런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두 해 전 추석쯤 가족들 모두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 엄마는 별안간 비장하게 엄마의 장례 이후에 다가올 날들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내가 죽으면, 제사니 뭐니 이런 거 하는 데 공들이지 말고,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이런 농담을 했었지, 이런 음식을 좋아했었지 하면서 살아 있을 적의 엄마를 성심껏 추억해주는 날로 가족들이 함께 기일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목도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엄마는 그날 목도에 그친 게 아니라 죽음이라는 단어를 만졌던 모양이다.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죽음을 통과한 삶의 잔해가 고운 가루로 속절없이 부서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다음이 아니더라도 다다음쯤의 죽음은 엄마의 차례라고 예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방을 제외한 집의 구석구석에 놓여 있던 짐들이 명절을 거듭할수록 착착 쌓인 채 늘어나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자꾸만 내 방에 있던 짐들을 정리하라고 성화인 엄마와 실랑이를 할 때마다 복잡하게 엉기는 슬픔을 마주하게 된다. 죽음을 너무도 생생히 만져보고 온 엄마가 죽음 앞에서 얼마나 벌벌 떨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아서. 자신의 죽음 뒤에 남겨질 이 집과 자식들의 삶에 예측 가능한 진동만을 남기기 위해 너무도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것 같아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늘 70대 후반쯤이면 죽어야지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운동도 안 해서 더 쉽게 망가지게 될 노후의 몸으로 뭘 얼마나 더 누릴 수 있을지, 안정적으로 노년을 누릴 만한 재산은 잘 쌓아 올릴 수 있을지 불투명하니까. 에너지 없는 육신으로 삶에 대한 어쭙잖은 마음만으로 연명하듯 사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엄마에겐, 삶이 조금 다른 대우를 해주었으면 한다. 죽음일랑 언제 오려는지 감도 안 오게, 죽음 이후를 설계하는 데 골몰할 시간 따위는 필요도 없게.


 명절 때 엄마랑 실랑이하는 게 피곤하니까. 이유는 단지 그것뿐인 걸로 해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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