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역의 슬라이딩 도어즈가 빚은 참사
12월 23일 토요일, 결혼 D+379
시간을 잘 지키는 것엔 참 쥐약이다. 나도 그런 나를 알고는 있다. 10시 10분 기차를 타야 한다고 할 때, 지도 앱에서 도보 시간, 환승 시간 이것저것 포함해 40분이 나온다고 알려주면 나는 정말 딱 45분을 앞두고 출발하는 스타일이다. 한 마디로, 시간을 여유 있게 지키려는 노력을 정말 최소한의 최소한만큼만 한달까. 그렇게 아주 꼭 맞춰 출발했어도 지하철이며 기차가 늘 나를 딱 태워 갈 만큼은 기다렸다 출발해주었던 덕에 ‘철도청의 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조금 다행이었다.
12월 중순에 태어난 조카의 돌잔치를 앞두고도 내 시간관념은 마찬가지였다. 대충 얼마 걸린다고 하기에 10분쯤 먼저 호떡과 집에서 나왔다. 충무로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는데, 4호선 충무로역은 3호선 충무로역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기다려주는 것처럼 시간대가 잘 겹치는 탓에 일단 3호선에서 하차하는 순간 4호선 타는 곳으로 돌진해야만 한다. (돌진 안 해도 되지만 돌진해야 할 만큼 빠듯하게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딩딩거리는 소음과 함께 뭔가 4호선 열차가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리자마자 무작정 빠른 걸음으로 돌파했다. 마침 문이 닫히려는데, 40cm 정도의 틈이 남아있기에 몸을 던져 쏙 들어갔다. 크~ 역시 나는 철도청의 딸이지. 오늘도 철도청은 날 버리지 않았어. 아슬아슬하게 이뤄낸 성공에 취해 있는데 호떡이 없다. 아뿔싸. 그 열차엔 나만 타버린 것이었다.
30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야 하는데, 그걸 타려면 무조건 호떡도 이 열차에 같이 탔었어야 했다. 주말을 누리려는 인파가 들어찬 4호선 열차에서 밀려오는 걱정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너 진짜 빠듯할 거 같은데? 바로 오는 거 타도 3분밖에 안 남아.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다 기차 놓치는 거 아냐? 나보다 달리기도 빠르면서 먼저 가서 보고 좀 뛰지. 푸념을 했더니 집에서 5분만 일찍 나왔어도 없었을 일이라고 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지금 이때 열차를 놓쳤으면 다음 스텝은 용산역에서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대와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시간대를 체크해보고,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열차를 타는 것이다.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려 찾아보니 용산역에서 가는 건 절대 탈 수 없는 시간이었다. 서울역에서 입석 끊어야겠다고 했다. 편하게 앉아 갈 수 있는 좌석 표를 놓치고, 취소해야 하는 표를 미처 취소하지 못하고 열차에 올라타버린 호떡과 나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지도 앱이 30분이란다고 그게 정말 30분이 되니? 안 될 거 생각해서 10분 더 생각해서 나온 건데? 역까지 걷는 시간은? 환승 시간은? 그때 나오면 이미 늦게 나온 거야. 넌 왜 그렇게 빠듯하게 가냐, 늘. 친구들 약속에도 매번 늦기나 하고. 네가 말한 그 늦은 시간에 나왔어도 나는 내가 끊은 기차표 잘 들고 탔어! 네가 굼떠서 같이 못 타 놓고 왜 나한테 뭐라고 지적질이야.
쓰다 보니 내 시간 개념이 정말 개판이긴 했는데 그날은 나도 도저히 지고 싶지가 않았다. 일단 뭐가 잘 안 맞아서 차를 놓치는 것까진 그럴 수 있다 치는데 왜 몸달아서 찾아보고 알려주는 건 늘 내 몫이어야 하는 거지? 억울함이 치솟았다. 계획을 세워둔 것이 무너질 때 무너지는 계획에 두들겨 맞고 있기만 할 거냐고! 왜 너는 나처럼 이것저것 백업 플랜이라는 걸 세우지 않는 거야?
양쪽 다 양보를 못 할 만큼 억울하고 짜증이 났던 호떡과 나는 여행 갈 때 환전은 나만 한다(호떡), 명절 때 부모님들 선물 챙기고 용돈 드릴 현금 인출하고 봉투 챙기는 건 누가 다 했냐(나), 명절 때 내려가고 올라올 때 운전하는 건 다 내가 했다 너는 옆에 앉아서 자기밖에 더 했냐(호떡), 등등으로 격한 핑퐁을 이어갔다.
그리고 끝날 것 같이 끝나지 않던 핑퐁은 급기야 호떡의 ‘너 우리 집에서 설거지 한 번이라도 한 적 있어?’로 튀면서 파국을 맞이했다.
설거지? 너 지금 설거지라고 했니?
네 집에서 너도 안 하는 설거지를 왜 나한테 얘기해? 어머님이 하지 말라셔서 나도 마음 불편해도 가만히 있는 거야! 내 대답이 더 기가 찬다는 듯 서로 기분 나쁠 말 다 한 것 같은데 이제 더 말 꺼내지 말고 대전에서 보자고 했다.
다 참을 만했는데 설거지는 진짜 어이가 없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시부모님댁에 가서 설거지하는 사람이야? 내 의무야? 너도 의무라서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설거지하는 거 도운 거야? 되물었더니 본인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제가 할게요, 했다고 했다.
나도 설거지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어머님이 하지 말라고 계속 말리셔서 안 한 것뿐이야! 그리고 설거지는 나나 너의 의무가 아니야. 니가 우리 엄마 안 도와줬어도 내가 우리 엄마 힘든 거 도왔을 거고 내가 설거지도 했을 거고, 그때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뭐라 안 해. 너도 그런 걸로 뭐라고 하면 안 되지. 어머님이 힘드신 것 같으면 네가 나서서 챙길 일이지.
결국 그것도 다 본인 탓으로 돌리는 것 같다며 어이없어 하는 호떡에게 다시 못박아 말했다. 시가는 너 낳아주신 부모님 계신 데고, 신경을 쓰려면 네가 먼저 써야지. 나는 객이지 종이 아니고, 네가 설거지 우리 집에서 안 해도 난 너한테 뭐라고 안 할 거야! 네가 할 때 내가 거들어도 될 일을 마치 내가 의무를 저버린 사람처럼 말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본인이 설거지 같은 일을 하겠다고 먼저 일어나면 내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 그러지 않았다는 궤변 같은 말을 늘어놓는 호떡에게 질려버렸다. 대전까지 가는 열차 안에서 억울해서 터지는 눈물을 네모난 휴지로 찍어 누르며 숨을 골랐다. 와 나 정말 이제 하다 하다 설거지 가지고 이런 소리를 다 듣네. 돌아오는 기차나 예매를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호떡에게 기차 안 탈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해버렸다.
돌잔치 가야 하는데, 이 꼴로 어떡하지. 거울을 보니 상태가 정말 난장판이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감출 방법을 고민하다 대충 화장품을 덧발라 어설프게 눈물 자국을 가리고는 상태를 재점검하러 화장실에 들어섰는데 일이 안 되려니 엄마를 딱 마주쳐버렸다. 엄마도 참 귀신이지. 보자마자 ‘너 울었니?’ 하시기에 얼결에 고백해버렸다.
호떡이랑 싸웠어. 흐어어엉. 엄마. 우리 너무 싸우고 맨날 싸워.
큰딸이 낳은 아들의 첫돌을 맞아 기분 좋게 등장했어야 할 엄마가 둘째 딸 부부싸움 소식을 듣게 해선 안 됐는데. 엄마는 엄마가 귀신이지? 하며 깔깔 웃더니 모른 체하시겠다고 약속하고는 돌잔치 장소에 같이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들어오다가 하필 형부를 마주친 호떡은 왜 둘이 같이 안 오고 있냐는 형부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와서는 내 옆에 어설프게 앉았고, 우리 귀여운 조카는 까르르 웃다가 대차게 울다가를 반복하며 아기다움을 뽐냈다.
“너희 싸웠니?”
모른 체하겠다고 했던 엄마는 말도 몇 마디 섞지 않고 뷔페 밥만 축내는 우리를 보고 끝내 한마디 하셨고, 서로 사랑하기에도 아까운 시간들이라며 다독이는 엄마의 말 앞에 못이기는 척 무너지기로 했다.
그 뒤로는 뭐…. 나는 조금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시간에 관한 한 호떡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로 했고, 호떡은 설거지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닫히던 충무로역 4호선 열차의 슬라이딩 도어즈.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에서는 다르게 빗겨나간 한순간이 초래할 수 있는 굴곡을 낱낱이 보여주었었나. 그날 우리 앞을 갈라놓던 슬라이딩 도어즈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시간 약속을 잘 지키자’와 ‘자기 집 설거지는 자기가 먼저 도와드리자’의 처절한 교훈을 남기며, 크게 덜커덩거리며, 굳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