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목요일, 결혼 D+1021
내 회사생활의 시작은 엉망진창이었다. 스물여섯,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나이에 입사했던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채 겁 없이 스스로를 내던졌던 첫 부서는 어마어마한 진상들이 득실거리는 영업의 현장이었다. 더욱이 서울에서 근무하고 싶었던 나의 소망은 배치 면담 때 인사 담당자에게 지독하게 말리면서 대대적으로 망해버렸고, 본가에서 엄마랑 살던 집에 살면서 해내야 했던 일은 몇 년 지난 지금 생각해도 녹록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런 지옥 같은, 맞지도 않는 영업인의 옷을 입고 일하던 때 나에게 위로였던 것은 같은 구렁텅이에서 영업하느라 바삐 움직여야만 했던 나의 친애하는 동기들이었다. 사실 우리는 신입사원 때 해야만 했던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꾸렸던 팀원들이었는데, 하라는 프로젝트는 안 하고 각자 흩어져있던 지역을 스탬프 투어하듯 찍으며 친목 도모에만 성공해버렸다.
한참을 매일매일 투쟁하듯 버텨냈던 영업 현장을 아주 다행히도 영업에 제일 취약했던 내가 제일 먼저 탈출하게 되었고, 다른 곳에서 일 년 반쯤을 보냈다. 그러다 완전한 탈脫영업조직으로 부서를 옮기게 되었던 내게 가장 아쉬웠던 것은 동기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각설하고, 최근 내가 있던 조직에 일대 변혁의 흐름이 생기면서 전주, 대구, 부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나의 동기들이 하나둘씩 상경하기 시작했다. 비록 근무지와 조직은 완전히 달라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서로 연락해서 한 시간 안에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이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날은 그 동기들 중 한 명의 휴직을 기념(?)하는 자리로, 정말 오랜만에 일곱 명(많기도 하다) 모두가 모이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퇴근을 하고 특수부위를 파는 고깃집에 갔다. 맛집에서 먹는 고기는 물론 맛있었고, 그걸 함께 먹는 동기들과의 자리 자체도 유쾌했다. 그 유쾌함이 지나쳤다. 호떡에게 연락을 수시로 해준다는 게 그만 8시 반을 넘기면서부터 연락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아니 뭐, 그날 사실 나는 몹시 멀쩡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많이 마시지도 않았고, 배부르게 속도 채워 넣고 술을 적당히 마셨기에 쉽게 취하지도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1차를 지나 2차로 술집을 가고, 그 술집에서 나와 노래방에 갈 때까지 한 번도 호떡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술만 먹으면 이러네?
열두 시를 갓 넘겨 온 문자에 네 시간을 연락도 없이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노래방의 잔여 시간은 36분. 36분 남았는데 중간에 나갈까?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며, 늦으면 늦는다 언제쯤 갈 것 같다 그렇게 얘기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다고 아예 연락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성난 톤이 쏟아져 나왔다. 울분에 차서 거의 포효하듯 소리를 지르며 화내는 호떡의 목소리에 내 머릿속 퓨즈도 같이 끊어져버렸다.
눈치챘겠지만 나의 멍청함은 역시나 그 포인트에서 빛을 발해서 너도 늦을 때는 말없이 잘만 늦어놓고 왜 나한테만 이렇게 난리를 치냐고 해버리고 말았다. 말을 말자는 호떡에게 아니 답장했는데 내가 아예 정신 나가서 연락을 씹은 것도 아니고, 열두 시 넘겨 연락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남긴 것도 난데 네가 답장을 하지 않아서 무어라 말하는 것을 잊었을 뿐이라고 받아쳤다. 네가 날 이 시간이 되도록 궁금해하지 않아 놓고 왜 답장도 없다가 이 시간에야 화를 내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내 등짝을 후려 치고 싶지만 그때는 또 맞는 말을 하는 나에게 취해있을 때여서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질 않았다.
― 그 동기들 만난다고 해서 그냥 둔 거지
이 사람아 제발 정신 좀 차려…
제발 부탁이야
오 주여, 그때가 마지막 사인인 줄도 모르고… 미안하다는 말을 그때도 조금 늦었었지만 그때라도 했었어야 했다. 그래도 더 있다가는 정말 뒤지게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노래방에 같이 남아있던 언니 오빠를 뒤로 하고 짐을 챙겨 나오긴 했다. 나오긴 했는데, 나오긴 했다.
― 그만 해 들어오지도 마 내 이름 부르지도 말고
메시지 전화 다 하지 마
끝내
끝내? 하 참나 끝내긴 뭘 끝내? 얘는 뭐 말을 이렇게 해?
사실 호떡의 이 끝 타령(타령이라고 해서 미안)은 고질적인 갈등 요소이기도 했다. 연애할 때부터 이랬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었다. 사귈 땐 이럴 거면 헤어지자더니 결혼하고서부터는 끝내자(이혼하자는 워딩으로까지 표현한 적은 없지만)고 했다.
짱구를 굴리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호떡의 회사 동기에게 염치 불고하고 연락을 취해보는 것이었다. 호떡과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을 알고 있었다. J 씨에게 연락을 했다. 호떡에게는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라며 다름이 아니라 호떡 씨 오늘 어떻던가요? 물었더니 호떡이 뭔가 스트레스 많이 쌓여 있는 건지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는지 평소랑 다르게 애매해 보이더라며 혹시 싸우셨냐고 묻는다.
많이 창피하긴 했지만 맞다고, 이런 일로 J 씨에게 연락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다섯 시쯤 구구절절 미안하다고 문자도 했었는데 답도 없고 읽었는지도 문자라서 따로 표시가 안 되어서 답답해서 연락했다고 말씀드렸다. 호떡은 네 시를 좀 넘겨서였나 윗분들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가서 여섯 시가 다 돼가던 그 순간까지 갇혀있다고 했다. 중요한 안건이라 아마도 문자를 못 봤을 것이라며. 너무 답답해서 연락드렸다, 죄송하다 했더니 어려운 일도 아닌데 괜찮다고 답해 주는 J 씨의 메시지가 그렇게 고맙게 느껴질 데가!
동기끼리 밥 먹자고 하니까 안 그래도 술 마시고 싶다고 하긴 했었다면서, 호떡에겐 모른 척하겠고 저녁 자리에 오게 되면 일찍 자리 파하고 보내겠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문자가 왔다.
― 미안 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J 씨, 얘가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데요 엉엉. 안 그래도 방금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핸드폰 보긴 하던데, 라고 하기에 오늘 만약 술자리가 생긴다면 답답한 마음 풀고 오게 좀 늦게 들여보내셔도 괜찮다고 했다. 이 정도는 편하게 알려드릴 수 있으니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시라는 J 씨에게 이런 일로 연락드려도 되나 엄청 고민하다 메시지 했는데 이렇게 따숩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술자리에 갔을 호떡에게 이 책을 쓰느라 잠시 나와서 있다가 들어간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애석하게도 그날은 읽씹을 당했다. 하하.
보통의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제풀에 지치게 마련인데, 이번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호떡의 태도로 미루어보았을 때 이번엔 정말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기 때문이고, 싸움이 길어질수록 힘든 건 나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적막 속에 아침을 연 나와 호떡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출근했고, 퇴근 시간을 맞아 다시 메시지를 남겼다. 정말 미안하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한 번에 풀리면 호떡이 아니지. 그냥 끝내는 게 서로 나을 수도 있다며, 다음에 또 그러면 진짜 끝이라고 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고 했다. 지금 지어지고 있는(이사 갈) 집을 당장 처리해버리고서라도 어떻게든 이런 상황에 다시 놓이고 싶지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음에 만약 이런 일이 또 있다면 얘기 자체를 하지 않을 거라고.
잘하겠다고 하고, 계속 잘하면 내가 아니지.
그날의 마음을 새기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 새벽 네 시까지 과로를 한 다음날 와인 네 잔에 양껏 취해버린 나는 북가좌동 어느 교회에서 나를 모르는 어떤 여성 분의 관대한 도움 끝에 호떡에게 인계되면서 또 다른 갈등을 맞이했다.
전에 J 씨에게 연락해야 했을 만큼 심각했던 그 날이 한 달을 겨우 지났을 시기에 또 이렇게 실망을 줄 수 있는지, 이번에 나를 나무라는 호떡은 뭔가 허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 내가 정말 왜 그랬지? 사실 와인 네 잔에 취하는 주량은 아니었고, 그때는 자리가 너무도 즐거웠기에 절대 고주망태가 돼서 집에 돌아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거기다 나쁜 일은 왜 몰려오는지, 호떡에게 술 마시고 연락을 하지 못해 실려온 일로 한껏 미움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또 자주 하던 실수를 저지르고야 만다.
우리 집의 삐걱이는 현관문. 아아, 주인님, 집주인님. 왜 우리 문을 우리가 살아온 3년 내내 고쳐주시지 않은 거죠? 우리 집의 현관문은 몹시 뻑뻑해서 그냥 스르륵 닫히는 법이 없고, 꼭 한 번 힘을 크게 주어 여닫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종종 한 번 더 힘주어 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리곤 했는데, 손에 짐을 들고 들어오는 일이 잦아서였다. 양 손에 짐을 한 가득 들고 들어올 때에는 짐 내려놓기 바빠서 문을 한 번 다시 꼭 닫아줘야 한다는 걸 까먹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샴푸가 떨어져 인근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 하는 샴푸를 두 통 사들고 들어왔었는데, 샴푸를 내려놓고 부츠를 벗고 또! 또! 문을 꼭 닫아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샴푸랑 같이 사온 깐 마늘을 열 알씩 때려 넣고 한 시간이나 시간을 들여 진득하게 수육도 끓였는데, 수육이 완성되었을 때에 현관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것을 호떡이 발견하고 만 것이었다! 오호, 통재라…. 문이 또 안 닫혀있네? 등골이 오싹했다. 어어? 그럴 리가 없는데– 했지만 문이 거짓말할 리는 없고.
밥을 다 먹고 나서 갑자기 닫히지 않았던 문이 생각난 호떡이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너 문 또 안 닫은 거 진짜 어떡해야 해? 벌금을 해도 안 돼, 도대체 안 그러겠다고 몇 번을 하고 또 그러는 거야? 너 진짜 다음에 이러면 나랑 끝이야!
미안해, 잘 닫을게. 근데 뭐? …끝? 아니 넌 끝이 왜 이렇게 쉬워? 이혼이라고 말만 안 했지 끝이 이혼이지 뭐야, 도대체. 욱해서는 안 됐지만 나 역시 함부로 끝을 입에 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의견을 피력해 왔었기에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뭐, 이제 마지막 에피소드니까 읽는 분들도 잘 알겠지.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잘못은 너만 했네의 반복 끝에 결국 우리는 또 상처를 서로에게 잔뜩 남긴 채 잠들게 되었다. 완전히 잠들기 전에 한 번 호떡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이야기해보면서, 그래도 끝(이혼) 얘기는 어지간하면 안 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상처만 될 뿐 원하는 대로 그런 말이 내 실수를 줄이는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 했는데 네가 잘만 하면 자기도 그런 심한 말을 할 일이 없으니 너만 잘하면 된다는 호떡 앞에 나도 장렬히 무너져버렸다.
말을 더 붙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무너졌다. 아니, 붙일 수 없는 수준으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