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결혼에 관한 버킷 리스트 중 1순위로 올라 있던 아이템은 엘리 사브Elie Saab의 드레스도 몰디브 같은 엄청난 휴양지로의 신혼여행도 아닌, 내가 쓴 손글씨를 넣어 제작한 청첩장이었다. 손글씨 쓰는 걸 아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고, 내가 직접 만들면 세상에 하나뿐인 청첩장이 될 테고, 나는 수백 장 인쇄한 청첩장 중 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오래오래 보관할 것이었으므로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써왔던 손글씨들을 하나하나 넘겨보다가, 청첩장에 많이 쓰여 온 시 구절을 몇 마디 짚어보다가 아무것도 마음에 드는 문구가 없다는 사실에 좌절할 즈음 무심코 둘러보던 내 메신저 프로필 배경화면이 번쩍 빛나듯 눈에 들어왔다.
‘다름을 지나 닮음으로, 사랑을 넘어 삶으로.’
내가 쓴 것치고 꽤 근사한 말이잖아? 어느 누가 써준 것도 아니고 내가 어디서 베낀 것도 아니고 나의 순수한 창작으로 만들어낸 글귀에 내가 직접 쓴 글씨라니 이거다 싶었다. 다름을 지나 닮음으로, 사랑을 넘어 삶으로. 다름을 지나 닮음으로, 사랑을 넘어 삶으로. 캘리그라피라는 것은 본디 수십 번을 써서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하나를 선택하는 지난한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므로 나는 같은 문구를 쓰고 또 썼다. 에이,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같은 문구가 빼곡히 들어찬 종이를 수첩에서 북북 찢어내 버리고 내가 한 일은 내가 봤던 프로필 배경화면에 등록된 바로 그 이미지를 찾아 재가공하는 일이었다. 포토샵으로 앵글을 바꾸고, 배경을 날리고, 콘트라스트를 조금 더 줘서 글씨가 또렷해 보이게 만들고 마음에 좀 걸리던 서명은 마음에 들던 다른 사진에 있던 것을 도려내 감쪽같이 기우듯 픽셀을 덧입혔다.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고급 툴은 잘 다루지 못한 탓에 정렬도 약간 안 맞고, 마치 에드 시런Ed Sheeran의 〈Lego House〉를 틀어보려다 얼토당토않은 러브 액츄얼리 사운드 트랙이 나오던 내 결혼식처럼 어딘가 조금 엉성한 내 셀프 청첩장은 그렇게 시작되어 완성되었다.
우린 다름을 넘어 닮음으로 잘 가고 있을까?
만난 지는 삼천이백오십일, 결혼한 지는 천일을 훌쩍 넘긴 부부임에도 남들이 보기에도 유난하다 싶을 만큼 지독하게 싸워댄 우리는 어쩌면 너무 닮아 짙어진 동족 혐오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닮았다고 생각한 만큼, 딱 그만큼의 반대급부로 실은 그렇게까지는 닮지 않았던 서로에게 잦게 실망하고 마는 건 아닐까.
와중에 하나 다행인 것은 사랑을 넘어 삶으로는 용케 잘 진입했다는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같은 집에 살고 한 이불을 덮으며 생활 반경이 이토록이나 일치하게 되었는데 사랑을 넘어 삶으로 가지 못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뚜벅뚜벅 삶을 걸어갈 만큼의 동력은 갖고 있는 나와 호떡은 그렇게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뜨거웠던 사랑을 되짚어보며, 어느덧 식어가는 듯 느껴지기도 하는 사랑을 가끔 움켜쥐고, 때로는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지는 것 같은 신기루를 보며 우리에게 놓인 하나뿐인 삶의 무대를 우직하게 걸어 나가고 있다.
‘너와 이혼까지 생각했어’는 농담으로 붙인 제목은 아니다. 결혼한 대다수의 부부들이 갈등을 봉합하다 못해 이혼까지 염두에 두는 것을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다 못해 이혼에 이르게 된다 해도 그것이 누군가의 극심한 결함이나 잘못에 기인한 것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는 것도.
그러나 한쪽이 상대를 기만하고 바람이라도 피웠다든가, 가정 폭력을 일삼는 상대방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든가 하는 극단적이고 반드시 이혼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들은 화목하게 하하호호 사랑하고 아끼고 아낌 받으며 잘 사는 것만 같아 우울해서 정말 이혼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면 어쩌면 나의 이 모든 싸움의 기록이 소소하지만 진실한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고 감히 생각하며 이 책을 썼다.
인생의 모든 단면이 사람마다 다르고 심지어는 내가 수년간 바라봐서 진실이라 믿던 누군가의 단면마저 어떤 각도에서 틀어 보면 전혀 다른 면이 발견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결혼이라고 해서 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 꼭 고결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꼭 싸우지 않아야만 성공한 결혼인 것도 아니겠지. 하여 방황하는 모든 부부들에게, 가장 치열하게 싸워본 호떡과 나의 기록을 위로처럼 바친다.
너와 이혼까지 생각했더라도 이혼에까지는 이르지 않는 지구력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을 손 붙잡고 나아가는 데 이 기록들이 조금의 힘이라도 되기를.
이 책을 쓸 수 있도록 이 책의 소재가 출판할 만하다고 흔쾌히 등을 떠밀어준 사랑하고 아끼는 나의 지인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이 책이 탄생할 수 있도록 나와 미친 듯이 치열하게 싸워 준 호떡에게도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우리의 천성이 이렇게 타고났으므로 후속작을 쓸 수 없을 만큼 적은 싸움이 이어질 거라는 괜한 기대는 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이렇게 지겹고 지난한 싸움판에서도 바닥에 떨어진 내 영혼을 끌어안아 주는 것은 호떡의 품뿐일 것이라는 것을 안다. 알기에, 앞으로의 삶에서 이어질 이 책의 결론이 ‘너와 이혼까지 했어’가 되지 않기를 온 영혼을 다해 바란다.
호떡, 너도 그렇지? 나 사랑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