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반려인 호떡과 나의 싸움은 결혼 땅! 하고 시작된 건 아니었다. 여자친구 남자친구였을 때부터 늘 싸워 왔고, 남들보다 조금 더 자주 싸워왔다. 별것도 아닌 걸로 물고 뜯고 씹으며(...) 보내온 날들을 지나 올해 들어 만난 지 만 10주년이 되었다. 20대였던 우리는 30대가 되었고,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신분 갈이(?)도 했다.
몇 년 전에 생애 처음으로 신점을 한 번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결혼을 이미 하기로 모든 계획을 다 짜 놓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치워지지 않는 의심, ‘나 정말 이 사람이랑 결혼해도 되는 걸까’를 거두기 위해 행차한 자리였다. 앉기도 전에 내게 다그치듯 무당(무당보다 더 나은 단어는 없을까), 아무튼 점을 봐주시는 분께서 말씀하셨다.
“언제까지 그렇게 핑퐁 할 거야? 왜 이렇게 지는 법이 없어?”
둘 다 자존심이 정수리 끝까지 차서는 서로 한 번을 져주려 하지 않는다고 혀부터 끌끌 차신 것이었다. 약간의 수치심과 정중앙을 정확히 꿰뚫렸다는 모종의 아픔 속에서 봤던 신점의 결론은, 시간을 좀 두고 하면 좋겠지만 당장 무를 수 없다면 그냥 하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든 내 인생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고, 정 안 맞거나 악연이라면 솔직하게 관두라고 할 텐데 악연은 아니니 받아들이라고.
그때 한 이삼 년 뒤에 하면 참 좋을 것 같다던 말을 무시하고 계획된 대로 결혼을 진행해버려서였을까. 결혼하고도 몇 번을 아픈 싸움을 했고, 세기 민망할 만큼 지겹게 많이 싸웠고, 그렇게 지겨울 만큼 여러 번 싸웠음에도 매번 싸움의 끝은 쓰고 아팠다. 호기롭게 싸운 기록들만을 엮어 독립출판을 해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나에게조차도 싸움은 맞닥뜨리고 싶기보단 온 힘을 다해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책에 들어갈 원고를 쓰는 중에도 싸웠다. 독립출판으로 책이 나오고서도 싸웠다. 50일 정도 지나 1쇄를 다 소진하고서 2쇄를 찍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는 이혼하는 거 아닌가 싶게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싸웠다. 《너와 이혼까지 생각했어》라는 책을 내놓고 진짜 이혼하면 너무 쪽팔리고 감당하기 힘든 수치심과 상실감과 열패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급히 2쇄 계획을 보류 단계로 끌어내렸다.
감당하기 힘든 싸움들이 몇 차례 삶의 뒤통수를 후려치듯이 굵직한 아픔과 상처를 남기며 지나가고 약간의 안정을 찾았을 무렵이었다. 호떡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지나치게 우울해진 나를 위해 전화상담을 제안했다. 본인도 간단히 상담을 받아 보았는데, 말 몇 마디만 들어도 울컥했다며 상담이 뭔가를 풀어주지는 못해도 거들어줄 수는 있을 거라고 했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우울의 농도를 옅게 만들어보려고 시작했던 상담은 호떡의 말대로 효과가 제법 있었다. 남들이 다 아는 이야기라 해도 전문가인 상담 선생님의 나긋나긋한 톤을 빌려 들으면 뭔가 조금 더 믿을 만해졌다. 내가 겪은 것보다 더 심하고 약한 케이스들을 숱하게 겪어오며 상담해온 전문가가 내리는 처방이라고 생각하니 조언들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했다. 개인적인 우울과 인생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던 나의 특질들을 탐구하는 상담을 몇 회 진행하고서 나는 호떡에 대해 선생님께 묻기 시작했다.
저희가 정말 많이 싸우는데요, 저희 어떡하면 안 싸울 수 있을까요. 걔는 저한테 왜 그러는 걸까요.
내 말을 듣고 선생님이 내려주신 결론은 산뜻하고 간결했지만 실천하기엔 어려운 것이었다.
두 분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달라요. 그걸 이해하셔야 해요.
잔잔하고 약한 데시벨로, 그러나 확신이 있는 단호한 어투로 선생님의 상담은 이어졌다.
“선생님(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셨다)은 싸우게 되면 ‘이해’를 하고 싶어 하시잖아요. 남편 분은 그렇지 않아요. 남편 분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만 중요한 분이에요. 선생님과 뭔가로 부딪칠 때 ‘사실’에 대한 언급이나 인정, 사과 없이 과정을 이해시키고 싶다고 말씀하시면 (남편 분은)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느끼실 거예요. 그럼 대화가 안 되죠.”
이렇게 직설적이고 단호한 해법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호함이었다.
“선생님은 누가 선생님을 때려도 때린 이유에 대해 납득하게 만들면 이해하실 분이에요. 재차 말씀드리지만 두 분은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요.”
상담을 하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정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 하는 나와, ‘사실’만을 다루고 싶어 하는 호떡은 싸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었다. 서로의 사고 회로를 이해하지 않고선 천 번을 싸워도 가시밭길 같은 평행선만을 달려야 하는 운명이었다. 선생님은 그 밖에도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들을 몇 가지 더 얹어주셨다. 실로 분分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상담이었고, 상담만으로 나의 기질이 환골탈태할 수는 없었지만 충분히 유효한 시간이었다.
‘결혼’은 추천할 만한 것이냐고 지인들이 많이 물어온다. 특히 남자친구가 있는데 결혼에 대한 확신은 없는 동생이나 친구들이 주로 질문자이고. 많이 싸우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한 그를 상상하기 싫고, 서로에게 서로가 최선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호떡과의 결혼은 좋은 일이긴 했다. 나는 늘 그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나한테는 좋은 것 같아.”
누구와 만날 줄 알고 함부로 결혼을 추천할 수는 없으니까, 나로선 그게 최선의 답변이었다. 어떤 사람은 정말 별로인데 A라는 사람을 만나면 완전히 다른 좋은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만인에게 친절하고 따사로운 사람도 그의 반려자에겐 지독하게 못난 반려자일 수 있는 것이 결혼이라는 세계이므로. 아니 사실 이건 결혼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또 모든 사람들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를 거듭할수록 짙어지는 명제가 ‘사람은 입체적’이라는 것이므로 누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관계의 결괏값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도 내 옆에 누워 잠들 나의 반려인 호떡과 더 많이 싸우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하려고 마음을 먹을 뿐이다. 잔뜩 성내고 싶어지는 내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마음먹기의 발현이 될 수도 있고, 전문가를 찾아 부부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또 다른 실행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사람과의 생활을 끝내버리기엔 호떡과 나의 부부생활은 내게 소중하기에. 치고받고 싸우고 싸울 때마다 나를 울리는 이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기엔 나는 아직도 겁이 많이 나니까.
그렇게 지금껏 가끔 슬펐지만 대체로 행복하게 지나온 십 년을 지나 이십 년, 삼십 년, 무사히 걸어 나가고 싶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나의 반려인 호떡도 그런 마음이기를. 그렇게 우리의 부부의 세계가 점점 힘을 얻어 끝내는 힘들이지 않고도 지켜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