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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Sep 17. 2020

남편이 준 충격적인 생일 선물

서른하나에 짱구 잠옷이라니

 12월 2일 토요일, 결혼 D+358



 12월 1일은 우리가 만나기로 한(!) 기념일인데, 그해 12월 1일 집 문 앞에는 택배 박스가 놓여 있었다. 마침 내 생일은 기념일 바로 다음 날인 12월 2일이었고, 택배 박스에는 ‘스파오’라고 적혀 있었다. 스파오? 뭘 시킨 거지? 웬 스파오, 라고 생각했다.

 그때 아주 미세한 불안감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사람 촉은 무시할 게 못 된다. 스파오라고 적힌 게 있다고 했더니 그냥 두라고 하기에 본인 걸 시켰나 보다 생각하고 넘겼거늘. 그 스파오 박스가 생일날 어마어마한 눈물로 돌아올 줄 모르고, 그땐 그냥 두라기에 정말 그 박스는 잠시 잊어버렸다.




 생일 아침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것까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주말을 시작하는 토요일이자 한 해에 딱 하루뿐인 내 생일. 아직 철이 덜 든 탓에 일 년에 하루밖에 없는 날은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호떡이 뭘 줄까 며칠 전부터 조금 들떠 있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설마설마 잊고 지나버리려 했던 그 스파오 박스에서 내 생일 선물이 나올지는 정말 몰랐다. 아니, 박스에서 그걸 꺼내 줄 때까지도 모르고 싶었다.


 컬러에 미쳤다고 하기엔 전문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컬러에 목을 매는 사람인 걸 알면서, 나 같은 파워 웜톤인 피부 톤에는 잘 어울리지도 않는 흰색이 과다하게 섞인 차가운 창백한 핑크 톤의 플리스 잠옷을 내가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나 그때 서른하나였는데? 스물하나 때 남자친구가 선물을 골라줬어도 이보단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더더욱 어이가 없었던 것은 이 선물이 내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했던 호떡이었다! 지나치게 과격한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머리에 총 맞지 않고서는 이런 잠옷을 좋아할 사람은 지구 어디에도 없을 걸! 그 잠옷은 심지어 짱구 잠옷이었는데, 왜인지 납득은 되지 않지만 구하기도 몹시 어려웠다고 했다. 품절되기 직전인 것을 자기가 용케 구해서 가져왔으니 너무 장하지 않냐며 뿌듯해하는 호떡 앞에서 기분 좋은 척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후진 연기력의 아내에게 이런 선물을 갖다 주면 어떡해.


 선물을 남에게 자랑하자고 받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당장 다음날 또는 금세 돌아올 월요일에 메신저로 들이닥칠 물음에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순간 아연 긴장이 들어 목이 뻣뻣해졌다. 호떡이 뭐 해줬어? 어? 어, 음…. 짱구 잠옷! 하하하. 짱구 잠옷? 짱구 잠옷? 그걸 선물이라고 줬다고? 너 생일인데?

 하지도 않은 친구들의 메시지가 환영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서운해 보이는 내 얼굴이 호떡의 마음도 서운하게 했는지 호떡은 짐짓 아쉬운 소감을 뱉었다. 고심해서 열심히 준비한 건데 그렇게 싫냐고 했다. 정말 싫었지만 애써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이건 내 피부 톤에 맞지도 않는 색이라고 설명했다. 그게 그냥 싫다는 소린데 아니라고 했다. 나는 피부가 하얘서(하얀 편이긴 함)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게 칭찬이냐 진짜.


 그래도 이거 진짜 구하기 힘들었는데 신경 써서 주문해서 구한 건데 그렇게 서운한 티를 내야 하겠냐고, 본인도 이제 정말 서운해진다고 투덜거리는 호떡에게 말을 하다 울음이 터져버렸다.


 호떡. 나 올해 서른 하나야. 이거 갖고 진짜 누가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 내가 다 쪽 팔려서 얘기 못할 지경이야, 이건. 넌 선물을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받아? 주는 사람 마음 생각해서 받아주고 그러면 안 돼? 자랑하려고 받는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닌데. 적어도 누가 물었을 때 나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일 년에 하루인 날을 특별히 기억하게 할 만한 무언가를 선물해야 한다고 너는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선물이 주는 사람 좋자고 주는 게 아니잖아. 선물은 받는 사람이 주가 되어서 생각해야 마땅한 거 아니야?


 뭐, 그런 얘기들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는 선물이어서 울다가 얼핏 허탈해서 웃었던 것 같기도.


 한참 실랑이를 한 끝에 호떡은 솔직히 12월이 (결혼 이후로는 안 챙기기는 하지만) 우리 만난 기념일부터, 내 생일, 내 생일 딱 일주일쯤 지나서 바로 결혼기념일에, (이것도 잘 안 챙기긴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너무 벅찬 달이라고 했다. 결혼기념일에 뭔가를 더 거창하게 하고 싶어서 그쪽에 힘을 주어 생각을 하다 보니 생일을 이렇게 귀여운 선물로 챙겨주고 싶었다고 항변했다. 짱구 잠옷을 보자마자 그걸 입은 내 모습이 너무 귀여울 것 같아서 꼭 주고 싶었다고. 휴.

 아무튼 그 선물은 평소에 아무 기념일도 생일도 아닌 날에 편의점에서 초콜릿 사 오듯 전해줬을 때에야 효능이 있는 선물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힘주어 설명하고, 내일 꼭 여자 동기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논해보라고 일렀다.


 생일 주간을 지난 월요일날 호떡은 여자 동기들(사랑해요)에게 이 일에 대해 설명했고, 말로 쥐어 터지고 와서 미안하다고 내게 다시 사과했다.

 짱구 잠옷, 따뜻하긴 했다. 겨울마다 앞뒤로 땀이 나게 뜨끈하게 잘 입긴 했다. 응 그래, 잘 입긴 했네. 어디 한 번만 더 짱구 잠옷 같은 걸로 내 생일 챙겨봐. 가만 안 둬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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