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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Dec 21. 2021

실패를 상상할 줄 아는 능력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바람*



실패를 상상할 

아는 능력


 어렸을 때는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유난히 실패를 계산하고 감정적으로 미리 앞서 나가는 데 유능하다는 걸. 눈앞에 닥친 과제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다는 걸. 그런 일들이란, 의지와는 상관없이 숨이 쉬어지고 밤이 오면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듯 내겐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맞이한 친구들과의 세계는 놀라운 걸 보여줬다. 서로 따스한 말만 주고받는 엄마를, 또 그런 엄마의 곁엔 높은 확률로 다정한 아빠도 존재한다는 것을. 어느 집은 너무 넓어서 이런 집은 도대체 어떻게 청소할 수 있으려나 걱정되기도 하고, 어느 집에서는 곱고 우아하기만 한 엄마가 매일같이 친구의 하교를 기다리며 간식을 만들어두기도 한다는 걸 말이다.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연신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정말 이런 세상이 있다고? 분명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데, 저 사람들의 세계는 저렇게나 풍요롭다고? 싸이월드에서 시작된 ‘내 것 같지 않은 세상’의 전시는 인스타그램이 탄생하면서 그 행렬을 끝없이 이어갔다. 날이 갈수록 그 신기한 세상의 면면은 점점 화려해지고 해상도가 높아졌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는 그런 세계에 사는 사람들 중 일부와 직접 만나게 되는 일도 왕왕 생겼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능력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실패를, 불가능을 계산하는 데 탁월했던 유년 시절을 보낸 나 같은 사람이라야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실패를 상상할 줄 몰랐다. 엎어 쳐지든 메쳐지든 일이 어떻게든 해결돼 왔던 적이 너무 많아서. 혹여 정말 안 되는 일이 생기거든 그것을 봉합해주거나 처리해주는 지인들의 도움이 당연스레 따라와서. 누군가는 한국에서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할 수 없게 되거든 해외로 유학을 가서 더 좋은 평가를 받는 대학교에 진학할 준비를 시작했다. 결혼을 하거든 부부가 함께 살 집을 서울에 마련하는 일은 품이 별로 들지 않는 일이었고, 아이를 낳거든 그 아이를 키울 환경을 뚝딱뚝딱 건설해줄 줄 알았다. 아는 것은 힘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패를 상상할 수 없는 이들을 보며 안다는 것은 때론 무력과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는 걸 배워야 했다.


 아주 오래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미래는 없다는 말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어떤 끔찍한 일도, 너무도 신기해 믿을 수 없는 일조차도 과거의 누군가가 이미 상상했던 일들 중 하나라고. 혹 내가 겪어온 모든 불행과 좌절 또한 내가 고해상도로 촘촘히 상상해온 실패 탓이었던 걸까. 성공에 가까운 일들만 상상할 수 있었다면, 내게 찾아오려던 실패의 발걸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일도 생겼을까.


 부질없는 짓이겠지. 정말 몰라서 모르는 것과 아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건 다르니까. 다만 오늘의 나는 다른 위안을 찾는 데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전의 나였다면 상상할 수 있었을 불행과 고통을 떠올리면서, 그때의 내가 그렸을 선택지 중에 지금은 더는 필요 없어진 것들을 소거하면서. 이젠 이런 것까지 상상할 필요는 없다고. 예전의 나라면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들을 상상할 수 있는 지금의 근사함은 어떻냐고. 같은 맥락에서, 지금으로선 도저히 찾아지지 않는 성공이나 행복의 작은 실마리 또한 언젠간 찾아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한 내 과거와 지금을 촘촘히 겹쳐보며 나는 그저 소망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실패를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기를. 적어도 지금 갖고 있는 광활한 상상력의 일부만은 끝끝내 소실하기를.




* 문맥에서 유추하셨겠지만 wind의 바람이 아니라 wish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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