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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 Jul 09. 2023

갈매기

안톤 체호프 저/장한 역

#북리뷰#독서노트


연극 갈매기를 본 후 내용을 천천히 다시 보고 싶어서 책을 구매했다. (연극 후기)


더클래식 출판사의 '미니미니북'으로 읽었는데, 여권보다도 훨씬 작은 손바닥만 한 사이즈였다. 글씨 크기도 작지 않아서 들고 다니기에 최고였다.


복잡한 너와 나의 연결고리 속에서 기승전결 없이 갈망-사랑-질투-절망의 감정만 반복되는 줄거리도 모자라, '이렇게 끝난다고..?'의 허무한 결말은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라고 한다.


초창기 비평가들이 왜 체호프의 극을 "'애매모호한 느낌',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주제도, 플롯도, 행동도 없는 드라마'라고 혹평"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호프는 극 중 니나의 대사처럼 그의 희극이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말하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희곡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르게 갖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감정으로 일상에서 만들어내는 캐릭터들의 갈등만으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웠다. 명백한 악역도, 극적인 결론도 없는 이 작품에서 더욱 흥미로웠던 점은, 각 등장인물의 사고와 이중성을 어느 정도는 모두 납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 독서 노트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등장인물의 생각을 이해하고 갈매기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니 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계산된 플롯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등장인물: 트레플료프, 니나, 트리고린, 아르카지나

갈매기: 등장 위치와 의미

체호프와 희곡


등장인물


<갈매기>와 갈매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등장인물의 배경과 내적 갈등을 알아야 하는데, 앞서 얘기했듯 얽혀있는 관계가 복잡해서 다이어그램 만들 뻔 주요 인물 위주로 정리했다.


트레플료프

아르카지나의 아들이고 스물다섯 살이다. 그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작품을 쓴다. 그는 고여 있는 예술계를 비판하며 기존의 연극 양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만들고 싶어 한다.

요즘의 연극은 그저 틀에 박힌 구태의연한 편견에 지나지 않아요. (중략) 따분한 대사와 빤한 장면에서 무언가 그럴듯한 도덕을 보여 주려 해요. 하지만 결국 언제나 똑같은 반복, 반복뿐이에요. 그것들로부터 저는 벗어나야 해요.(21)

낡아 빠진 노인네들이, 예술계 윗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자신들이 만든 것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것을 잘못됐고 틀렸다고 억압하고 무시하면서요! 난 그런 예술관은 인정하지 않습니다!(109)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그의 새로운 형식의 연극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다. 어머니에게, 대중에게 작가로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어머니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며, 니나를 순수하게 사랑한다.

저는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해요. (중략) 어머니의 응접실에 자주 드나드는 유명 인사들이 저에게 친절할 때, 그 시선 속에서 저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23)

 

니나

호숫가 저택에서 아버지와 계모와 살고 있는 젊은 여배우다. 그녀는 트레플료프와는 다르게, 감정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연기하고 싶어 한다. 니나트레플료프의 연극이 너무 일상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당신의 작품은 연기하기가 무척 어려워요. 생생히 살아 있는 인물이 없거든요.(28)

아르카지나와 같은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그녀는 화려한 삶과 명성을 동경한다.  

작가나 여배우가 되는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저는 주변 사람들의 냉대, 환멸, 가난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락방에 살면서 보리빵만 먹어도 좋아요. (중략) 저는 세상에 명성을 바랄 거예요. 진정한,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 명성 말이에요...(87)

배우가 되고픈 큰 야망을 위해 트레플료프의 사랑보다는 트리고린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편을 택한다.

저는 무대로 진출하겠어요. 아버지 곁을 벗어나서 모든 걸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거예요. 당신처럼 저도 떠날 거예요. 모스크바로 갈 거예요.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123)


트리고린

마감에만 쫓기는 영혼 없는 유명 작가다. 항상 다음 작품을 걱정하며 소재거리에 찾기에 바쁘다.

써야 한다, 써야 한다, 써야 한다는 하나의 생각이 밤낮으로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중략)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끊임없이 글을 씁니다. 다른 일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80)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당신이 말한 모든 표현과 단어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나만의 문학 창고에 쌓아 두려 애쓰고 있습니다. (중략)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기에 항상 편할 때가 없습니다. 마치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듯 여겨집니다.(81)

트리고린에게 작가란 직업은 물질과 명성을 주지만 생명을 갉아먹는다고 얘기할 만큼 압박감을 갖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 회피처로 아직 '세상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니나를 만난다.

그녀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존재일지도 몰라요.(113)

이 부드러운 얼굴을, 천사 같은 순수한 표정을 다시 볼 수 있다니.. 나의 소중한 니나.(124)


아르카지나

25살의 아들이 있는 43살의 여배우다. 여배우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삶에 매우 집착한다. 여배우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인 삶은 살기에, 아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트리고린에게 매달린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옷차림이나 머리단장에도 신경을 쓰지. 내가 한 번이라도 실내복만 입거나 흐트러진 머리로 집 밖에 나서는 걸 본 적이 있니?(58)

그런데 전 아직 그 애의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없답니다. 너무 바빠서.(153)

지독한 구두쇠로 가족에게도 매우 인색하다.

오데사의 은행에 7만 루블이나 예금을 갖고 있으면서도 누가 잔돈푼이라도 빌려달라고 하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된다니까요.(20)

그래요. 사실 돈은 어느 정도는 있어요. 하지만 저는 여배우잖아요. 의상비만으로도 파산할 지경이라고요. (102)


갈매기


갈매기는 트레플료프, 니나, 트리고린 사이에서 상징성을 지닌다. 다음과 같이 여섯 곳에서 등장하며 각 인물과 갈매기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1. 첫 등장

트레플료프의 연극이 중단된 후 나누는 니나트레플료프의 대화 중에 처음 나온다. 바닷가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갈매기처럼, 니나는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맴돈다.

아버지와 계모는 나를 여기 오지 못하게 해요. 이곳엔 보헤미안들이 사는 곳이라고 하시면서...
보헤미안의 소굴이라고. 내가 혹 배우라도 될까 봐 걱정이신 거죠...... 그런데 난 이곳 호수에 끌려요. 마치 갈매기처럼.... (26)

2. 두 번째 등장

이번에 갈매기는 트레플료프의 소총에 맞아 죽어서 등장한다. 트레플료프는 니나의 발치에 죽은 갈매기를 내려놓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오늘, 비겁하게도 이 갈매기를 죽였습니다. 이걸 당신의 발밑에 바칩니다. 이렇게 곧 나도 목숨을 끊을 겁니다. (74)

3. 세 번째 등장

트레플료프가 죽인 갈매기를 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 트리고린을 보며 니나는 무엇을 적는지 물어본다. 트리고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냥, 별것 아닙니다. 착상이 떠올라서... 단편 소설을 위한 겁니다. 호숫가에서 자라난 한 젊은 처녀가 살고 있고, 그래요, 당신처럼 말이죠. 호수를 갈매기처럼 사랑하고, 또 갈매기처럼 자유롭고 행복하죠. 그런데 우현히 어떤 사람이 찾아와 그녀를 알게 되고, 심심풀이로 그녀를 파멸시킵니다. 마치 이 갈매기처럼 말이죠.(89)

4. 네 번째 등장

트레플료프에게 보내는 니나의 편지 중에 등장한다.

편지 한 줄 한 줄마다 괴로움과 병적인 신경질이 느껴졌으니까요. 그녀는 한 가지 이상한 환상을 갖고 있더군요. 서명이 '갈매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루살카>에 나오는 물방앗간 주인이 자신을 '까마귀'라고 부르듯이, 늘 자기를 갈매기라고 되풀이했습니다.(141)

5. 다섯 번째 등장

샤므라예프는 갈매기를 박제했다며 트리고린에게 말한다. 하지만 트리고린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 장면은 두 번이나 나온다.

트리고린 씨, 집에 당신이 부탁하신 물건이 있습니다. 언젠가 트레플료프 씨가 총으로 쏘아 죽인 갈매기를 박제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셨지요. (153)

이게 아까 말씀드렸던 그 물건입니다. (책장에서 갈매기 박제를 꺼낸다) 부탁하신 거예요.(169)

6. 마지막 등장

4막에서 니나엄청난 독백을 내뱉으며 그 유명한 "나는 갈매기예요"라는 말을 한다.

난 갈매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갈매기를 총으로 쏘아 죽였던 것 기억해요? 우연히 한 사내가 한 여자를 심심풀이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단편 소설에 쓸 작은 이야깃거리... 아니, 아니에요. (중략) 이제 난 그렇지 않아요. 이제는 진짜 여배우예요. (165)


갈매기의 의미


체호프는 19세기말의 러시아 사회를 배경으로, 정부의 압박과 구태의연한 기성세대의 가치관 속에서 흔들리는 젊은이의 두 가지 모습을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격동하는 사회를 겪으며 현실에 굴복하고 순응하는 집단과 반항하는 집단이다. 언제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순진한 갈매기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에 순응하거나(닭둘기처럼) 퇴출되거나(죽거나)다.

트레플료프도, 니나도 스스로를 '갈매기'라고 칭하는 장면이 나온다.


트레플료프는 자신이 죽인 갈매기처럼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2번째 등장), 니나는 갈매기라고 말하다가 결국엔 갈매기가 아니라고 부정한다(6번째 등장). 트레플료프에게 갈매기는 자아와 정체성, 소신이었고, 니나에게는 이루고자 하는 야망이었다.


이 갈매기들도 사회에서 시련을 겪었다.


트레플레프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자 노력하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아들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무너뜨렸고, 연인은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자 곁을 떠났다. 반면 니나는 자신이 이루고가 하는 야망을 가지고 사회의 가치관에 순응하려고 했지만,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각박한 사회에서 버림받는다.


하지만 이 두 갈매기의 결말은 달랐다.


트레플료프는 반항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엔 굴복했고, 니나는 그 시대에 스며들려고 노력했고 상처받았지만 자유를 찾아간다. 트레플료프는 결국엔 무엇을 원하는지 방향성을 잃고 죽음을 택하지만, 니나는 '여배우'임을 인정하며 다시 날아간다.

이제 난 알아요, 코스챠.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글을 쓰건 내가 무대에서 연극을 하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꿈꿨던 빛나는 명예가 아니라 견뎌 내는 능력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견디는 법을 배우고, 또 신념을 가져야 해요. 나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괴롭지 않아요. 나의 사명을 생각할 때면, 나는 인생이 두렵지 않아요.(165-166)


니나의 대사처럼, 중요한 것은 견디는 것이다. 그것도 신념과 믿음 가지고 견디는 것이다. 변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로부터 아예 등을 돌릴 순 없다. 현실에서 벗어날 순 없다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결말이었다. 이래서 연극을 보고 나왔을 땐 시각적으로도 씁쓸했던 이 결말에 우울함과 찜찜함이 많이 남았던 것 같다.


체호프와 희곡


여러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글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엿볼 수 있었다.


트레플료프처럼 그의 작품 역시 초기 비평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통적 희곡 형식에서 벗어나 그만의 기법을 발전시켰고 지금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 되었다.


좋은 작품이란, 글의 주제와 메시지를 작가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도른 | 작품에는 명료한 사상이 담겨야 해. 작가는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 알고 있어야만 하지. 그렇지 않고 맹목적으로 예술의 길을 걷게 되면 넌 네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 거야. 그럴 땐 오히려 너의 재능은 너를 파멸시키는 독이 될 거고.(53)


트리고린 | 가장 최악인 것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희뿌연 연기가 내 정신을 혼미하게 해, 가끔 내가 무엇을 쓰는지조차 알지 못할 때가 있는 겁니다.(85)


트레플료프 | 그래, 문제는 낡거나 새로운 형식이냐에 있는 게 아니야. 좋은 작품은 작가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얼마나 자유롭게 써 나가는 것에 달려 있어.(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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