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한도전을 보면서 저녁을 먹었다. 이번 영상의 주제는 멤버들끼리의 패션 싸움. 초창기 무한도전 멤버들의 착장은 나로서는 "저 옷을 입는데 왜 코디네이터가 필요하지?"라는 의구심이 드는 수준인데, 그들이 저마다의 패션 철학을 갖고 서로의 겉치장을 지적하는 것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멤버 중 패션을 가장 사랑하고 파격적인 시도도 마다하지 않는 노홍철 역시 공격을 피해 갈 수가 없고, 오히려 가장 많이 헐뜯기기도 한다. 사실 해당 장면이 연출되는 것은 시청자들의 웃음을 위해 더욱 강력하게 비난했기 때문일 것이며, 비난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들의 패션에 대해 별 생각이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출연진들이 웃고 떠들며 서로의 패션을 놀리다 보면 정말로 우스꽝스럽게 보이곤 했다.
지금까지 패션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패션에는 정답이 없다'라는 전제에 많은 이가 동의했기 때문이리라. 시대별로 패션 아이콘 및 디자이너가 각자의 개성을 한껏 드러내며 몸소 시행착오를 겪어준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개인의 철학에 맞는 실루엣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은 즉슨, 앞으로의 패션의 발전을 위해서는 역시 '정답'의 존재를 부정하고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연하다 싶은 말을 개성 발현을 독려하는 캠페인을 펼치듯 재수 없게 꺼낸 이유는 필자가 그간 해당 의견에 100% 동의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음이 최근 탄로 났기 때문이다.
패션을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둔 덕에 주말에 성수동을 자주 간다. 요즘 국내외를 막론한 패션 브랜드들이 팝업 스토어를 활용한 마케팅을 적극 펼치고 있으며, 성수동은 어찌어찌 서울에서 '팝업 스토어 특별지구'와 같은 지위를 얻었다. 따라서 여자친구가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 역시 성수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세간에선 팝업스토어가 남발되는 상황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도 존재하는 듯하지만, 오프라인 매장을 따로 운영하지 않는 브랜드의 제품을 몸소 경험해 보고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로서는 꽤나 메리트로 작용했다.
아무튼 성수동에 자주 간다는 것은 그만큼 길거리의 패피들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일 일이 많음을 의미한다. 필자는 만화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전투력측정기를 착용한 것처럼 견제되는 대상을 길에서 골라 그들의 패션력을 나름 측정하며 본인과 비교하고는 한다. 패션에 대해서는 나름 열린 마음가짐을 갖고 있기에 나보다 멋진 사람들이 줄줄이 등장해 한 수 가르쳐줬으면 싶으면서도, 슈퍼-멋쟁이를 너무 많이 마주치는 상황은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매번 이런 마음가짐으로 외출하는 필자의 패션은 객관적으로 돋보이는 편은 아닌데, '난 튈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거야'라며 합리화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뭐 나름대로의 패션 주관을 고수하는 것이니 그렇게 구린 행태라고 생각하지는 않기도 하다.
그러던 와중 최고권력자께서 약 1년 전 '젠틀몬스터'에 방문하여 착용해 본 선글라스 중 나에게 가장 어울렸던 것을 기억해 이번 생일에 하사해주셨다. 평소 선글라스를 '투머치'라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패션 아이템이라고 여겨온 탓에 내 돈을 주고 선글라스를 살 일은 없었으나, 선글라스가 생긴 뒤로는 그것을 선물 받을 날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외출마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갔다. 필자가 받은 모델은 '로풀 01' 모델로, 렌즈에 아주 약간의 음영이 들어가 '틴트 선글라스'로 분류된다. 따라서 선글라스보다는 안경의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선글라스 특유의 '투머치함'이 조금은 상쇄된 모델이어서 보다 애용했던 것 같다. 그래도 조금 튀는 디자인인 것 같긴 하지만.
색안경의 효과는 실로 굉장했는데, 밋밋한 얼굴에 재미 요소를 한층 추가하고 평소 자신 없던 부위를 가려주어 필자를 자신감 과잉 상태로 만들었다. 똑같은 착장에 선글라스만 추가했을 뿐인데 모두가 날 신경 쓰는 것 같았으며, 지나가는 유사 패션피플들이 그렇게 좆밥 같고 아니꼽게 보일 수가 없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간 날은 성수동에 있던 사람들 중 패션 파라미터로 내가 최상위권에 위치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이처럼 선글라스는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사람을 건방지고 재수 없게 만들었다. 그저 그런 아웃핏에 선글라스 하나 얹어졌을 때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나의 심리상태뿐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처럼 그간 확고하다고 믿어왔던 패션 철학은 선글라스 하나에 통째로 부정되는 허상에 불과했다. 모든 개성이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단언하던 내가 색안경을 통해 본 개개인은 모두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해당 착장 그대로 무한도전에 출연하게 된다면 멤버들과 대중들로부터 온갖 꼬투리를 잡혀 수많은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여자친구가 색 없는 색안경을 선물로 줬을 때 나에게 바란 것은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차분함의 미학을 중요시하며 각자의 철학을 존중하는 척하면서 그 누구보다 돋보이기 위한 정답에 혈안이 된 사람이 아니었을까?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그동안 애써 숨겨온 내면이 드러났다는 게 우습고 부끄럽다. 그런데 만약 남들에게 보내는 경멸의 시선을 철저히 숨길 수 있도록 안경알이 시커먼 선글라스를 선물 받았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꼴 보기 싫었을 자신을 생각하니 참 다행인 노릇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