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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은 2400일을 선물해 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by ALGORITHM

처음은 무척 낯설었다. 데이트도, 그 사람과의 대화도 어디 하나 어색할 것 없이 매끄러웠다. 그녀는 내 고등학교 후배였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아는 체한 적이 없던 사이였다. 그런 후배와 처음 서울 숲에 갔다. 나는 내게 없던 자상함을 십분 장착하고 가서, 영혼까지 끌어다 좋은 사람 시늉을 했다. 그냥 평범한 날 중에 하나구나 생각하며 화장실에 가서야 나는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산발이 된 머리, 흐트러진 옷매무새, 눈가에 부스러기가 있는지도 모른 채였다. 얼마 후 나는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이른 감이 있었지만, 내 마음을 받아줄 것만 같은 동물적인 육감으로. 그리고 적중했다.


소문의 벽은 두터웠다. 그 사람의 입을 통해 나를 향한 의구심을 전해 들었다. 내가 부족한 탓이었다. 나를 겪어보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는 별로 무겁지 않았지만, 가벼운 만큼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그들이 야속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별일 아닐 것이었다.


초봄에 만난 우리는 초여름에 헤어졌다. 한 계절 동안 나는 소문이 맞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했다. 사랑을 주고받을 준비가 안 돼있었다. 부족했다. 그러나 깨달음은 없었다. 그리움만 있을 뿐. 2주일 동안 나는 거의 곡기를 끊다시피 했다. 그리고 나 좀 봐달라며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치한 짓이었지만 소동의 끝은 그 사람에게 향했다. 모질지 못한 그 사람은 나를 마지막으로 만나줬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악수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나는 스스로 여러 가지 조정을 해야 했다. 말과 행동, 태도. 결국은 마음을 다듬어야 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던 공격적인 의구심은 더욱 부풀어서 늘 내게 돌아왔다. 내 말과 행동을 잊은 나는 나의 자승자박을 잊은 채 사람들을 미워했다. 모든 문제는 내게 있었음을, 친구들과 가까이에 있어도 깊은 이야기가 메말랐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제야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사랑받기 시작했다.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펍에 가서 돈이 없어 몰래 화장실에서 돈 좀 부쳐달라고 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하나도 벅차지 않았다. 대학생의 연애는 가난한 법이니까. 없어도 내가 사주고 싶고, 피곤해도 데려다주고 싶었다. 대신 사진 속 내 옷은 거의 변화가 없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효자 사진이 됐다. 그때는 좀 서글펐지만. 우리는 그렇게 100일을 맞아 교복을 입고 학교엘 갔다. 함께한 추억은 없지만 각자의 추억을 돌이키며 그때 서로의 존재를 그제야 찾았다.


특별할 것 없지만 서로에게 특별한 우리는 지금까지의 100일을 23번 더 반복하고 나서야 오늘을 맞았다. 그간에 우린 많이 변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난 그 사람에게 오랜만에 손 편지를 썼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분위기가 편지가 들어갈 자리를 모두 채운 것 같아서. 옛 생각이 났다. 푸릇푸릇하게 촌스러운 우리가 보였다. 난 편지에 다짐을 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사랑하겠노라고. 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들던 찰나에 그녀가 나를 부른다. 나는 다시 그 세계로 빠져든다. 아주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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