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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난슬 Dec 30. 2023

응시하기 - 성다영 스킨스카이 비평

23-2 현대시강독 과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은 쉽다

─「하얗고 깨끗한 손」 부분


1 시에 담기는 것


시에는 무엇이 담기는가. 시에는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이 담긴다. 그 대상은 그저 그 자리에 놓여있을 뿐이고 시인은 거기에 있는 것을 응시하며 텍스트화하는 것이다. 성다영의 시집 『스킨스카이』에는 시인이 바라본 세계가 담겨 있고, 그 언어들의 시적 발화를 통해 독자들은 시인의 시선을 얼핏 이해하는 듯한 착각을 받을 수 있다. 착각은 착각에서 그칠 때도 있고 가끔은 정말로 그 시인의 시선에 동화되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시인의 시선의 교집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시인의 시선을 빌렸을 때 우리는 잠시마나 시의 화자와 동화되거나 화자가 전혀 다른 타자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하려고 하는 이야기보다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것에 가까운 듯하다. 시인의 시에서 등장하는 공간은 공원, 카페, 시장 등으로 일상에서 전혀 마주칠 수 없는 특수한 장소가 아니다. …일상적 상황에서 시적 정황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적 정황이 되는가. 시인의 시에서 등장하는 상황은 시인이 아닌 인간들에게도 특별하지 않다. 누구나 겪어본 적 있고 마주한 적 있는 상황인 것이다. 본 시집의 시에서 주로 등장하는 단어들을 집합으로 묶으면 그 키워드는 비인간, 퀴어, 여성일 것이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비인간’이다. 비인간은 인간의 곁에 존재하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다. 비인간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하면서 인간인 퀴어와 여성까지 함께 담은 것은 비인간과 퀴어, 여성이 세상에서 받는 취급이 크게 다른 결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인간은 인간을 제한 모든 것들인데, 인간의 속성을 가진 퀴어와 여성은 왜 비인간과 비슷한 결로 취급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 중심 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언급되고 있다. 비인간과 비인간 취급을 받는 인간은 결국 ‘비인간’이라는 키워드 아래에 함께 집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인간 취급을 받는 인간이 아닌, 진짜 비인간은 시인의 시선에서 어떻게 비치는가. 비인간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더 상세히 분류되고 제각각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인간이 그들에게 붙인 기의는 그저 관습일 뿐 그 대상 자체를 완전히 알릴 수 없다. 애초에 그러한 시도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수만 가지의 분류법으로 그들을 서로 가르고 제각각의 이름으로 부른다..


모래도 진흙도 없는 수조에서

다리가 묶인 채 레고처럼 빈틈없이 쌓여 있는 큰 게야 누가 너의 이름을 대게로 지었니


(...)


어느 동물권 운동가의 인터뷰

엄마가 있거나 얼굴이 있는 것은 먹지 않아요

그러나 얼굴이라는 것은 너무 인간적인 생각이 아닐까


나는 큰 게 해삼 버드나무 플라타너스 이름을 모르는 나무 우듬지의 아주 작은 벌레의 얼굴을 떠올린다


여기에 인사하는 나무 있잖아요

누군가 말했을 때

사람의 손 모양이 아니라 흔들리는 나뭇잎을 먼저 보는 것처럼


대게는 처음부터 대게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무언가’였고, 인간이 발견한 뒤 큰 게라는 뜻에서 대게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사람에게 인지된 대상은 인간을 위한 쓸모를 다하는 역할을 억지로 떠맡게 된다. 대게는 먹힘의 쓸모를 부여받아 먹힘을 당할 때까지 수조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는 비인간인 대상들이 어떤 성질을 제각각 가지고 있는가 와는 상관없이 오직 인간의 시선에서 그 쓸모가 판정되어 그 쓸모를 이루기 위한 존재로 대상화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시인은 묻는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먹는 종류의 생물군으로 들어가게 되었느냐고. 대게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게가 갇힌 수조 앞에서 싱싱하다며 지나가는 사람도 대답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레디-메이드」)라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시인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시인이 제시하는 물음은 타자의 의문이 선행된 다음 출발한다. “왜 사람 다니는 길에 강아지를 다니게 해요?”(「레디-메이드」) 그 길은 언제부터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을까. 언제부터인지와는 상관없이 지금 현재가 그렇다고 초점을 맞추기에 현실은 사람이 다니는 길만이 너무 많다. 강아지는 흙과 풀이 있는 곳을 좋아한다며 공원은 그런 곳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이어서 질문한다. 여기는 잔디보호구역 들어가면 안 된다는 커플의 말에 무엇으로부터 잔디를 보호하는 것이냐고. 여기는 잔디보호구역이니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과 이어지는 질문인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거나 생각했더라도 의문을 이어가지 않았던 질문이 시에서 다시금 이렇게 우리의 인식을 깨운다. 무엇으로부터 잔디를 보호하는 것일까. 잔디는 무엇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람이 다니는 길은 왜 보호받지 않는가. 사람이 걸어 다님으로써 길이 받는 피해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깊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시인의 물음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물음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시 안의 진술은 독자에게 질문으로 들리게끔 되어 있다. “하늘이 충분히 어둡지만 별이 보이지 않는다/있다는 것을 안다”(「같은 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무언가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그것은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까. 물리적으로 공기가 나쁘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진술은 그리 단순하게 읽히지 않는다. 많은 것들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곧 시야에서 보이지 않아도, 가시화되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인지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이야기를 시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읽는 이에게는 감흥을 일으킬 수 있다. 그간 모르는 척했던 사실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해마다 처음이다

계절이 끔찍하게 이어진다

어떤 동물은 태어날 때를 제외하고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


이것을 읽는 동안 어떤 생이 닫힌다


인간에게 시간이 해마다 처음인 이유는 정말로 처음인 것처럼 멍청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과거에 저지른 일들에 대한 과오를 자연 파괴로 인한 자연재해로 수차례 돌려받아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행위가 멍청한 것이다. 멍청하다의 정의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 무디고 어리벙벙하다 혹은 ‘어리석고 정신이 흐릿하여, 일을 제대로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없다’이다. 인간의 멍청함은 두 경우 모두에 해당된다. 이어서 계절은 끔찍하게 이어진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인간은 비인간을 착취하며 살아간다. 그 행위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머뭇거림은 있어도 멈추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어떤 생은 닫힌다. 시인이 포함된 인간 종이 살아있음으로 인함이다. 어떤 생은 ‘어떤’ 생을 말하는 것일까. 인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비인간의 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땅을 밟고 선다면 그 땅에 살고 있던 생명들의 생이 닫힐 것이고, 무언가를 먹는다면 먹힘으로 인해 그 주체의 생이 닫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 종은 인간의 한자어와는 달리 단지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비인간들을 깔아뭉갠 뒤 그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비가 내린다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


가끔씩 시간은 끔찍하지

다들 시간이 빨라서 무섭다고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은 감각


비처럼 막을 수 없다

비산한다


비가 내리는 것은 단지 비가 내리는 것이다. 정도에 따라 무언가를 파괴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비는 그저 내리는 것이다. 시간이 빨라서 무섭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뿐이다. 비인간들은 그저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은 감각이라고. 시간이 흐르는 것이 무섭고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 같은 감각의 무서움은 과연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다는 감각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에 촉발되는 것이다. 실제로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음에도 우리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달라져야 하는 것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는 단 한 명의 개인이 그 사실을 인지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막아낼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그 광경을 응시하며 비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들로 인해 비산하는 주체들은 시 「같은 날」에서 말했듯, 비인간이다.


깎여나가거나 먹힘으로써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대상은 주로 비인간이고 행위를 가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따라서 시인은 말한다. “사라져 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너무 작은 숫자」)라고. 무엇에 대한 비유를 말하는 것일까. 시집을 읽었다면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난 것은 결국 사라진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알려고 하지 않지만). 작은 것이 사라진다 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크기로든 인간 기준에서의 중요도든 무엇인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결국 더 큰 것(마찬가지로 크기와 중요도)까지도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이든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인간 종마 저도 그럴 수 있다. 시인에게 그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미 너무 많은 비인간의 생이 닫히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 많은 비인간의 죽음 앞에서 고작 인간의 죽음에 대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저 응시하며 시에서 말한다. 진짜로 무서운 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은 감각이라고.


장소를 생산한다

너는 내가 만드는 장소 안에 있다

여기는 어디라고 할 수 없는

아직 어디가 아닌 곳


(...)


이것이 놀이처럼 보인다면

너는 해석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눈이 빠르게 내린다 눈이 불규칙적으로 흩날리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이제 너도 안다 나쁜 일은 인간이 만든다


다시, 먼지 같은 눈이 차분하게 내린다

이제 너도 안다 나쁜 일은 인간이 만든다


「스킨스카이」의 첫 번째 행은 메타적으로도 읽을 수 있다. 독자는 시인이 만든 공간 안에 들어간 것이라는 말이다. 시인은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독자를 초대한 다음 무엇을 어떻게 할 생각일까. 화자는 어떤 의지를 가지고 독자를 잡아끄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공간 안에서 세계와 독자를 응시하고 있다. 나쁜 일은 『스킨스카이』에 실린 시의 대부분에 정황으로 나열되어 있다. 인간이 살기 위해 다른 비인간들을 착취하는 행위들 말이다. 이제 알았으니, 그다음에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고 시인은 굳이 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모든 것에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시를 읽고 새로운 인지를 깨우쳤다면,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비인간에 대한 감각이 선연해지면 그 이후의 행위는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다시 본문의 첫 인용 시로 돌아가보자.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은 쉽다”(「하얗고 깨끗한 손」) 시인에게 가장 쉬운 것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 이외의 모든 일, 비인간이 착취당하는 것을 막는 일은 어렵다.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시인이기 때문에 시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2. 시집이라는 물성


시집 『스킨스카이』 에는 가의 말보다도 우선되는 문구가 있다. 표지를 넘기고 면지를 지나 독자가 처음 맞닥뜨리는 문구는 ‘자연에게’이다. 自然으로도, 누군가의 이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시집에 실린 시의 성질을 생각하면 전자에 더 가까운 듯하다. 자연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이다. 앞뒤로 다른 정황을 덧붙이지 않고 자연에게,라고 썼을 때 우리는 무엇을 감각할 수 있는가. 자연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 자연 안에 속한 우리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시가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 결은 모두 비슷하기에 한 시집 안에 모인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그저 자연에서 태어나 그저 자연 속에 머무는 것이다. 『스킨스카이』는 인간이 화자로 존재하지만 그 초첨을 비인간에게 맞춰져 있고, 이 시집을 손에 쥔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자연이라는 감각을 깨우칠 수 있다.


3. 작가의 말


시집이라는 물성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시인이 필요하다. 그 시인은 시에 대해 본격적으로 시를 보여주기 이전 페이지에서 시인의 말을 싣는다.


이것은 단지 쓴 것


이것을 읽는 동안 시간이 흐른다


성다영의 이 말을 보고 들으면 시의 쓸모에 대해 오고 가는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쓸모를 위해 태어나는 것들도 쓸모를 다하면 더 이상 쓸모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시는 쓸모에서부터 태어나지 않고 그저 시인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다. 시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고 텍스트 등의 매개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뿐이다. 애초에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해 쓸모를 논하는 것이 시의 존재보다 더 무의미하다. 시인 성다영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시는 단지 쓴 것이고 그것을 읽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흐르는 것이다. 시를 읽는 동안 시간이 멈추는 일은 없다. 시는 단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고 그것은 시인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세계의 공통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시를 써서 시인이 되고 사람들은 왜 시를 읽어서 독자가 되는가. 어차피 시는 쓸모없는 것이고 시를 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는 듯한데. 여기에서 시 쓰기와 읽기의 딜레마가 시작될 수도 있지만 이 문제는 이미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모두는 그저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 욕망하는 대로 움직이라는 지시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은 욕구대로 움직이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는 그저 쓰인 것이다. 시인이 바라보고 주목한 세계는 다른 매체가 아닌 시집을 통해 시로서 발화된다. 그 발화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한 적 없다. 그래서 시는 ‘단지 쓴 것’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다음 몫은 독자인 우리의 것이다. 스쳐 지나가듯 지나 보냈던 세계가 있다는 것, 그 세계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타자의 세계가 아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라는 것. 그것을 알아버린 이상 이전처럼 살 수는 없다. 그 모든 일들을 모르는 척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결국에는 우리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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