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의 발밑에는 한 움큼의 안개가 숨결 가득 자리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산꼭대기 아래로 보이는 풍경은, 이수가 여태껏 살아가면서 봐왔던 것과는 달랐다. 그곳은 다른 세계였다. 어디든 다른 곳으로, 또 다른 시간으로, 이곳을 넘어 새로운 공간으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수는 점점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럴수록, 이수를 잡은 손힘은 더욱 거세졌다. 그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붉은 실핏줄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웃기게도 선우가 좋아하던 화분을 끌어안으며 했던 말이랑 같았다. 조금씩 시들어가던 화분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쓸어내리던 그 모습이 생생하다. 선우는 또래보다 작고 여렸다. 작은 일에도 쉽게 고개를 떨궜고, 울음을 흘렸다. 빨개진 얼굴로 내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던 선우, 그렇게 언제나 쭈뼛쭈뼛 나에게 다가와 새하얀 찍찍이 신발을 바닥에 끌었다. 그 손을 잡고 끌어주던 건, 언제나 나였다. 그래서 날 붙잡은 선우의 손이 낯설었다. 내가 수없이 잡아끌었던 그 손이, 차갑고 메마른 절벽 끝자락에 매달려서야 낯설었다.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작은 몸에 의지하고 있는 지금의 자신을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선우의 차가운 뺨을 타고 흘러내린 온기가 천천히 내 손마디마디를 훑고 지나간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흘렀다.
선우의 손을 잡아끄는 것은 언제나 나였으니까. 이번에도 내가 먼저 옳은 선택으로 선우를 이끌어줘야 했다. 놓아줘야 했다. 선우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게, 이제 내가 없이도 살 수 있도록. 괜찮아. 괜찮아. 언제나 외치던 말들을 곱씹었다.
"난 괜찮아."
선우가 안심하도록, 날 놓아도 괜찮도록,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잡은 손이 조금씩 미끄러져 내렸다. 선우는 버티고 있던 왼발을 끌어와 체중을 뒤로하고 양손으로 날 더 꽉 붙잡았다.
수선화였다. 선우가 그 말을 하던 화분이 수선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