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원을 처음 다녔던 시기도 아마도 이쯤. 딱히 내가 원해서 가기 시작했던 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태권도장 근처고 누나도 다니고 있어서 큰 거부감이 없이 다녀보겠다고 했었다, 아마도. 난 이 시절의 예스맨이었다. 그래서 누가 얘기하면 뭐든 쉽게 시작했고, 또 이때는 생각보다 적응력이 좋아서 잘 안 맞아도 1년 정도는 대부분 다녔다.
첫 영어학원은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것 같은 유명한 어학원이었다. 전국에 수많은 가맹점을 두고 있었기에, 막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동네 중심 상가에도 분점이 하나 차려졌다. 첫날 선생님은 영어 이름이 있냐고 물었고, 고개를 젓는 나에게 '닉'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대략 몇 주 동안은 다른 아이들과 같이 수업을 듣지 않고 따로 선생님과 한 30분 정도를 수업하고 나머지 30분은 컴퓨터 앞에서 말하기 연습 같은 걸 했다. 선생님과는 간단한 알파벳, 발음기호, 그리고 be동사 같은 기초 문법을 공부했고, 컴퓨터 수업은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 다양한 스토리에, 원문으로 나오는 텍스트를 따라 읽는 것이었다. 난 이때 이 영어책 등장인물들이 참 기형적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길고 위로 구부러진 코에, 흐물흐물 이상한 눈매를 하고 체형도 전체적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스토리 또한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내용을 다 알고 나서도 이게 뭔 내용이지? 하고 생각하게 했다. 어려서부터 만화책을 포함해 다양한 책을 읽는 걸 좋아했던 나는, 기승전결이 전혀 없는 스토리에 당황하기도 했으나, 다른 아이들도, 선생님도 그런 내용적인 부분의 완결성이나 감상은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어가 다르면 문화도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좀 더 크면서 해외 번역 책들을 읽으면서, 학원 교재의 내용은 무엇보다 아이들 학습 맞춰져 있어 그 외 부분들이 빈약하다는 걸 알게 됐지만.
대략 한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나도 드디어 다른 아이들과 같이 수업을 듣게 됐다. 대부분 나이가 비슷한 일여덟 살. 가끔 여섯 살 아이들이 보이기도 했다. 반에 아이들이 많지는 않아서, 금방 친해졌다. 사실 그전에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수업 듣는 걸 동경 하면서 기웃기웃 다른 반들을 돌아다녔기에, 얼굴은 제법 모두 익숙했다. 이때부턴 한 시간 정도 수업을 하고, 집에 가기 전 단어 시험을 봤는데, 나는 태어나서 숙제라는 걸 해본 적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기에-더군다나 단어를 외워 오라는 것은 유형의 형태를 가진 숙제는 아니었기에-매번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고 남아서 단어를 외우고 또 시험 보고 떨어지고 외우고를 반복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학원에 갔는데, 매번 갈 때마다 두 시간 수업을 한다는 마음을 먹고 학원에 갔다. 한 시간 수업, 한 시간 단어 외우기. 외워야 하는 단어 수가 한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였고, 한두 개 정도는 틀려도 선생님이 봐줬던 거 같은데, 나는 매번 한 시간이 걸려서도 잘 외우지 못했다. 딱히 안 외웠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외웠는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그냥 딱히 빨리 가지 않아도 됐었다. 집에 가도 놀게 별로 없었고, 오히려 학원에 있으면 다른 친구들이 많았으니까. 나는 두 시에 수업이라고 하면 한 시간 정도 더 빨리 학원에 올 정도로, 학원에 있는게 마냥 좋았다.
선생님은 딱히 엄격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한 시간 정도 남아서 단어 시험을 보게 한 후에도 통과하지 못하면, 다 못 외운 단어는 다음에 꼭 외워 오라고 말한 뒤 보내주었다. 그러면 나는 같이 남은 다른 친구들과 오히려 아쉬워하는 표정을 하면서 학원을 나오곤 했다.
학원을 나와서 할머니가 준 천 원짜리 지폐로 불량 식품을 사 먹으며 거리에 있는 돌을 차면서 집에 와도, 아직 해가 온전히 떠 있는 세네 시를 넘은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보통 집에 가방만 놓고 동네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러 가거나, 놀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저녁쯤 되면 돌아와 밥을 먹고 애니메이션을 봤다. 이때의 하루는 참 이르고 길었다.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것 같아도 매일이 달랐고, 하루하루가 정신없었다. 그래도 큰 걱정 없이 살았다. 유치원이든 학원이든 모두 재밌었고, 밤이면 지쳐서 잠에 들어도, 아침이면 다시 쌩쌩하게 일어났다. 무언가에 집착하며 열심히란 말에 정신을 쏟지 않아도 하루를 온전히 보내던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때의 평범한 하루들이, 오늘, 이 글을 쓰면서도 눈 깜짝하면 지나는 시간에 정처없이 흘러가는 순간을 애써 붙잡던 않던 그 시절의 마음가짐이,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