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룔룔 Jun 17. 2021

축제와 외로움

줄리아 홀터 “Feel You”와 엘리엇 스미스 “Rose Parade”

Julia Holter - Feel You (Official Video) - YouTube

Elliott Smith - Rose Parade (from Either/Or) - YouTube


1.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태양 아래의 삶을 상상하지만, 햇볕이 충분하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놓고 도시의 태양이 싫다고 노래한 사람도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 멕시코시티엔 비 오는 날이 많다는 거야. / 거기 가기엔 좋은 이유지. / 내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는 걸 알잖아.”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지는 듯한 건반과 허밍 소리가 들리며 이러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것은, <피치포크>에 따르면 “하이데거와 버지니아 울프(또 아마도 로리 앤더슨)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은 사람이 만든 베드룸 팝” 같은 앨범을 낸 적 있는 아티스트의 개인적 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곳이 뉴욕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줄리아 홀터(Julia Holter)는 로스앤젤레스에 산다.


이 노래의 화자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멕시코시티에 있는 것 같다. 날씨 핑계를 대지만, 그가 이곳(아마도 불타는 서니 캘리포니아의 최대 도시 로스앤젤레스)을 떠나고 싶은 진짜 이유는 ‘너’ 때문이다. 비옷을 챙겨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향하지만, 서머타임을 착각해 지각을 하고 만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이미 텅 비었고 사람들은 모두 가버렸다. 그는 택시를 잡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기억력이 부실한 이 화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널 향해 가고 있을까? / 무더운 날이야.” 이곳도 무덥긴 매한가지고, 희미한 종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비옷을 입고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는 그를 기묘한 향기가 에워싸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또 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축제날이다.


줄리아 홀터의 <Have You in My Wilderness>(2015)의 첫 곡 "Feel You"는 혼자 도시를 헤매는 이의 하루를 단편소설처럼 담아낸다. <피치포크>에 따르면 “도시의 황홀한 혼돈과 거리를 조절하며, 감각적으로 관조하는 이야기”, “프란시스(영화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와 다르지 않게, 춤을 추다가 우아하고 품위 있게 그러나 서투른 게 매력으로 느껴지도록 넘어질 것 같은”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 <지지>(Gigi, 1958)로부터 영감을 받아 도시(아마도 로스앤젤레스)의 외로움과 불안과 환희를 포착한 컨셉 앨범 <Loud City Song>(2013)의 연장선에서, 이 잘 짜인 이야기-소리들은 풍부한 질감과 색채를 전달하며 결국은 초현실적인 축제의 장소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리고 그는 이 낯설어진 도시에서 읊조린다. “난 섬광을 봤어 / 눈이 멀었지 / 가능성이라는 것에.”


기실, 도시는 ‘가능성’의 장소다. 어디에나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갖가지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도시는 우리를 외롭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익명의 자유를 선사하고 풍부한 상상의 여지를 펼쳐놓는다. 이곳에서는 언제나, 비유적으로 또는 실제로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열린다. 그래서 이 노래의 화자는 누군가를 찾고 있고 또 기다리고 있다. 그는 ‘너’를 상상한다. 곡의 초반부에서 단어의 리듬감을 한껏 극대화하며 배치된 파열음과 마찰음들은 이 설렘을 산뜻하게 전해준다. 그는 묻는다. “나는 너를 느낄(만날/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도시가 배경인, 우리 시대의 로맨스를 성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접점 없이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얼굴 중에서 바로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 가장 내밀한 곳까지 이해할 수 있을, 특별한 교감을 주고받을 ‘너’를 향한 갈망. 이 달콤한 환상은 도시의 뿌리 깊은 외로움을 자양분으로 자라난다.


하지만 그에게 이 “가능성”에 대한 환상은 곧 “불가능”의 현실에 자리를 비켜준다. "인파가 빠르게 지나쳐도 / 내 눈은 매우 잘 알아차리지만 / 비옷을 입고 내가 기다리는 그 사람을 알아보는 건 / 불가능해.” 몽롱한 꿈처럼, 또는 후덥지근한 대기처럼 감싸는 두터운 허밍음을 뚫고 간헐적으로 끼긱거리는 바이올린은 이 백일몽에 균열을 내며 불안을 배가시킨다. 화자는 자신의 인지능력을 자부하지만, 비옷이 시야를 가리고 축제 인파에 휩쓸려서야 도무지 ‘너’를 찾을 수 없다. 사실, 이 노래에서는 ‘너’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너’에게 닿지 못한다. 그가 의심하는 것처럼 ‘너’는 “신화 속 존재”, 아직 실체조차 없는 사람, “가능성”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환상, 이 가능성에 기꺼이 눈이 멀기를 자처한다. 그것이 우리를 외로움으로부터 구해내고, 우리가 새로운 곳에 가도록, 이 도시를 헤매면서 새로운 것들과 마주치도록 촉발하기 때문이다. 환상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화자는 너무 늦어버렸고 너무 많이 착각에 빠졌고 너무 자주 실수를 했지만, 결국 집을 떠나 멕시코시티에 갔고 그곳에서 우연히 마법 같은 축제를 만났다. 사람들이 붐비는 축제에 홀로 남겨져 누군가의 눈엔 처량한 신세로 보일지라도, 도시가 전해주는 이 충만함은 부정될 수 없다. 겹겹의 레이어를 이루는 목소리와 퍼커션 소리, 여러 악기들이 한데 합쳐져 감정을 고양시킨다. “Feel You"는 비구름이 걷히고 황금빛 태양이 빛나는 순간을 연상시키는 사운드로 끝을 맺으며, 그렇게 우리가 ‘너’, 즉 이 도시를 온몸으로 느끼도록 한다.



2.

축제에 홀로 남겨진 사람의 슬픔과 기쁨이라는 테마는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의 노래 “Rose Parade”에서도 변주된다. (엘리엇 스미스는 1999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겨 말년을 보냈다.) 우울하게 침잠하는 앨범 <Either/Or>(1997)에서 축제 풍경을 담아내는 이 노래는, 이례적으로 들썩이지만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로즈 퍼레이드는 스미스의 고향인 포틀랜드에서 매년 6월에 열리는 유서 깊은 축제로, 이 노래의 화자는 ‘너’로부터 이 퍼레이드를 함께 보러 가자는 권유를 받는다. 배터리를 넣으면 북을 치며 움직이는 “듀라셀 토끼 인형처럼 거리를 행진”하는 퍼레이드가 그는 썩 내키지 않지만, “날 따라 로즈 퍼레이드에 안 갈래?”라는 ‘너’의 말에 마지못해 그곳에 간다.


지속적으로, 또 다른 높은 기타 리프가 솟구쳐 신경을 긁으며 불편한 감정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드럼이 가세하고, 이 노래의 화자는 동행인의 기분과 이 흥겨운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축제 행렬에 끼어들어 “윙크와 손 인사”를 보낸다. “모두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인들에게 금화처럼 생긴 캔디를 뿌려”대기도 한다. 그는 “개에게 발이 걸리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밀어내고 떠들어”댄다. “트럼펫 연주자는 분명 술을 마셨는”지 “정말 간단한 멜로디도 엉망이고” 악대는 형편없으며, 그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승전가를 따라 불러”야 한다. 이곳에 무난하게 동화되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너는 저게 볼 만한 광경이라고 말하지. / 그저 모두의 흥미가 내 흥미보다 더 강할 뿐이야.” 화자는 이야기한다. 남들과 관심사가 다르다는 것, 이 시끌벅적한 축제에서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그가 가진 불편함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한 인터뷰에서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로즈 퍼레이드’는 [포틀랜드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행진을 하고 당신이 이 허세 행렬에 참여하길 기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퍼레이드 일반에 관한 거예요. 알잖아요, 누군가는 그러고 있는 걸요. ‘우리는 좋아 보여요’ 같은 태도로 말이죠. 사람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인 척 퍼레이드를 벌이려 애쓰면서 많은 걸 망쳐요. 그들은 아주 잠시,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러고 나선 다 글러먹은 거죠.”


다시, 도시에서는 언제나, 비유적으로 또는 실제로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열린다. 도시에 이어 인터넷이 제3의 자연이 된 세계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퍼레이드를 하고 축제를 벌인다. 바이러스가 전 세계 도시를 뒤덮어 축제와 모임이 금지된 2021년에도, 사람들은 가장 좋아하는 옷을 차려 입고, 도시의 힙하고 핫한 가게들을 찾아다니며, 조명이 가장 좋은 장소에서 가장 자신 있는 각도와 포즈로 사진을 찍고, 가장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골라 SNS에 게시한다. ‘좋아요’와 ‘마음에 들어요’를 주고받는 시끄러운 행렬 속에서, 자신이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뿌듯함, 지인은 물론 낯선 타인들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지만,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축제가 끝나면 일말의 공허함, 실제의 내가 아닌 누군가를 연기하고 있다는 괴리감이 우리를 찾아온다. 축제는 일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에서 신경이 곤두선 높은 기타 리프가 사라지는 지점은 화자가 이렇게 노래할 때이다. “거리를 청소할 때 / 여기 남아 있는 쓰레기는 나밖에 없을 거야.” 모두가 떠나고 축제가 끝난 자리에 홀로 남겨진 그가 느끼는 감정은 자괴감만큼이나 해방감이 크다.


도시(그리고 인터넷)를 배회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마음에 깊숙이 다가가지 못하기에, 만남의 사건을 갈구한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도 깊숙이 가닿지 못하기에, 외로움을 느낀다. 타인을 속이는 건 의외로 쉽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의 불안을 키운다. 어떤 외로움은 자신을 속이는 상황, 자기조차 자신이 누군지 알아주지 못하는 상황을 숙주로 한다. 물론 실제의 나, 진짜 나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노래의 화자가 그렇듯, 부정적인 감정, 내가 싫어하는 모습일지라도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울증 환자의 전유물이거나 유약한 감상주의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직면하는 것은 어쨌든, 용기가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어도 편하지 않지만, 자신을 급습하는 어긋남의 감정을 회피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흥미’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축제가 끝난 거리를 혼자 맴도는 그가 “날 따라 로즈 퍼레이드에 안 갈래?”라고 말을 건넬 때,  “Rose Parade”가 들려주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느껴본 적 있는 우리는, 그가 꾸리는 또 다른 축제에 기꺼이 따라가고 싶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란노을로부터 시작하는 길고 긴 에세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