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았던 추억들’의 다음을 보기 위해서
#파란노을 #찐따 #성장 #세상 #자의식 #자유 #노스탤지어 #미래 #슈게이징 #드림팝 #인디 #홍대
그는 뉴욕에 살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나 런던도 아니다. 버지니아나 시애틀도, 스톡홀름이나 도쿄도 아니다. 파란노을은 서울에 산다. 이름도 얼굴도 밝히지 않은 채 ‘20대 초반 학생’으로만 알려진 이 음악가는 고등학생 때부터 자기만의 방에서 혼자 음악을 만들어왔다. 포스트록, 이모코어, 슈게이징을 즐겨 들었고 유튜브에 음악추천 채널도 운영하는 헤비리스너로서, 그는 올해 2월, 가상 악기로 만든 두 번째 앨범을 밴드캠프 그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로컬 인디씬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 깊이 영향을 받았으나 이제는 인터넷에서 자취를 감춘 몇몇 음악가들을 생각하며, 또 십대 시절에 좋아했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영화의 감성을 한껏 녹여서, 이제 갓 스무 살에 접어든 아이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날것 그대로 음악에 담아냈다. 무수한 음악들이 범람해 금방 흘러가버리고 마는 인터넷의 시대,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되고 회자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저만의 사소한 흔적들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시대착오적인 꿈”이라고 적은, 일견 냉정해 보이는 ‘현실’ 인식을 담은 라이너 노트와 함께,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 이후의 진행 과정은 마치 방구석 리스너의 망상을 극대화한 서사 붕괴 음악영화 같았다.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유저 참여형 음악 평점 사이트 RYM의 메인 페이지에 리뷰가 떴고, 한때 RYM 2021년 차트 1위까지 올랐다. 한국보다 외려 해외 리스너들의 지지를 얻으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웹진 <피치포크>에서 10점 만점에 8점을 받았다. 세 차례에 걸쳐 한정 발매된 카세트테이프는 금세 품절이 되었고, 국내 음원사이트들은 이 앨범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동아일보>는 물론 일본과 미국의 음악매체에서 파란노을의 인터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불과 2달 만에, 파란노을은 전세계적으로,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름이 되었다. 팬데믹 상황이라 라이브공연 요청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 앨범이 이러한 현상을 일으킨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배경이 있다. 한국‧일본‧영미권의 슈게이징과 포스트록과 이모코어와 베드룸팝 등을 골고루 섞고 일본 서브컬처를 서사적 레퍼런스로 취한 이 앨범은 서울이라는 지리적 장소, 로컬씬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 밴드캠프와 유튜브와 RYM 등으로 구성되는 인터넷씬에서 먼저 알아본 음악이며, 그곳 리스너들이 공유하는 핵심적인 취향과 환상을 자극하며 유통‧홍보‧확산된 음악이다. 밴드캠프를 사용하는 1인 음악가가 혼자 가상 악기를 통해 만든 음악.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 연주자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음악을 소비했던 헤비리스너가 만든 매끈하지 않은 음악.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고 경외했던 음악들을 황금비율로 조합하며 오마주하는 음악. 철저히 익명인, 유명세에 대한 욕망과 야망이 없는 안티-셀럽의 음악. 언어를 막론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밈으로 소비되는 표현과 자조의 정서를 레퍼런스로 하되 그 내부의 복잡한 감정들을 당황스럽도록 솔직하게 펼쳐낸 음악. 십대라는, 전세계 공통으로 잔인했던 시기를 통과한 이들의 감정선을 건드리며 성장의 문제를 제기하는 음악. 이러한 의미들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스토리가 언어와 무관하게 이 앨범의 주변을 특별한 기운으로 채운다.
동시에 이 앨범은 한국어로 만들어진, 한국의 ‘현실’을 담아낸 음악이기도 하다. 어떤 한국어 화자들에게 “찐따 무직 백수 모쏠 아싸 병신새끼 사회부적응 골방외톨이”라는 가사가 외설적인 충격으로 강타하는 음악이다. 밴드캠프 음악가 소개글에 쓰인 "Seoul, South Korea", 이 장소의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이 더욱 흥미로워지는 이야기는 이 앨범을 둘러싼 한국 리스너들의 반응들이다.
RYM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앨범 리뷰란에는 “전투 민족! 이런 사이트에서조차 편을 갈라 싸우는 코리안은 역시 대단하다” “한국인만 싫어하는 한국 앨범”과 같은 말들이 한국어로 올라왔다. 자신의 감상을 담담하게 적은 영어 리뷰들을 비집고[1], 이곳에서조차 한국인들은 다른 견해를 존중하지 못한다는 타박, 자기 취향은 아니라 별 두 개를 주지만 이 앨범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하고 별점 테러를 하는 건 너무하다는 지적들이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앨범을 좋아하기 힘들다는, 그래서 평점을 높게 줄 수 없다는 한국 리스너들의 이유를 모으면 대략 이렇다: 이보다 비슷하면서 더 나은 음악도 많은데, 아마추어 티가 풀풀 나는 이게 고평가를 받는 상황이 못마땅하다. 은유적‧시적이지 못하고 직설적인 가사, 반복이 지나친 구조, 엉망인 노래 실력, 소리가 깨지고 따로 노는 거친 믹싱, 가상 악기 사용, 새로움이 없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완성도가 거슬린다.
한편, 한국의 몇몇 남성 평론가 및 블로거들의 선제방어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들은 이 앨범에 대해 ‘인셀’이니, 쎄한 ‘오타쿠’ 감성이니, 낡은 ‘루저’ 정서니 하면서 선을 긋고 말을 아꼈다. 이 앨범이 환기시키는 2000년대 국내 인디음악이 “‘루저를 대변하는 자조적인’ 정도였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구식이기도 하고 조심스러워야 할 부분”이라는 신중하고 모호한 표현도 있었고, “2030 남성의 왜곡된 열등감이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시키고, 정작 실제적인 약자들에게 혐오 폭력을 저지르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하지 않는가”라고, 이 정서의 유해성을 더 분명하게 밝힌 글도 있었다.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인색함, 그리고 어떤 오타쿠‧루저 정서에 대한 선 긋기. 이러한 태도는 얼핏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한 가지 현상의 두 측면처럼 읽힐 여지가 있다. 완성도라는 이름을 내세워, 아니면 분명히 존재하는 위계를 눈감고 피하거나 밀쳐내는 방식으로 이들은 어떤 위계를 ‘승인’한다. 장르 자체에 대한 취향 문제를 제외하면, 호오가 확실히 갈리는 부분도 바로 이곳이다. 아마추어적인 형식이 로파이 미학으로서 찐따미 넘치는 내용과 조응하며 그게 더 친근하다는, 자기도 음악을 만들고 싶어진다는 호의적인 감상 옆에는, 이 부족함, 이 매끄럽지 않음, 이 취약하고 뜬금없게 몰입을 깨는 서투름에 대한 불쾌감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찐따(루저)’와 ‘씹덕(오타쿠)’이라는 말을 둘러싼 부정적인 이미지들로의 손쉬운 도약이 있다. 외형적으로나 사회적 성취 면에서나 심리적으로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면 하찮은 존재라는, 또는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거부감 드는 오타쿠들이 좋아한다는 일본문화를 좋아한다면 역시 위험하다는, 또는 열등감이 있다면 개인의 문제이며 왜곡돼 타인을 해하는 방향으로 분출하리라는 선입견들이 불쾌감을 합리화한다.
이것은 ‘찐따’라는 말이 지난 10여 년간 교실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특히 10대(그리고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20대 초중반) 남성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꽤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가 위계로 변환된다기보다,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 차이가 발견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외모, 성적, 커뮤니케이션 능력, 관심사, 인기 등 외면의 차이가 확연히 눈에 보이는 교실에서 힘의 서열이 세워지는 과정은 간단하다. 이 상하관계가 소위 '스쿨 카스트'라 불리는 것이며, 이때의 지위와 서열 만들기의 감각은 어른이 된다고, 또 환경이 바뀐다고 금세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직접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그래서 모두가 평평(평등이 아니다)하게 '찐따'로 간주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조차 부단한 ‘찐적찐’이 이루어진다. 자아의 취약함, 결핍과 과잉, 즉 내면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치부를 드러내며 자진해 모욕에 노출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모두가 저마다의 약점과 결점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고유한 존재로 만든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어쨌든 그런 자신과 상대를 대수롭지 않게 (비)웃어넘기는 ‘쿨찐’이 되어야 한다. 자조(自嘲)는 쿨찐의 핵심 윤리다. 이 상태에서 진지해져버리면 ‘찐’, 즉 ‘찐따’이자 ‘진짜’가 된다. 그러면 지는 게임이다. 불쾌함을 부정하며 유쾌함을 잃지 않는 척하기, 모든 것을 우습게 여기며 유희거리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 '진짜'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기,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기. 이것이 위계를 숨기며 표면상의 평등과 일시적인 안전함을 약속받는 게임의 규칙이다.
파란노을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이 예리한 논평을 가하며 개입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파란노을은 스스로를 “행동하는 찐따”라 일컫고, 자신의 가사를 “새벽 디시에 올라오는 우울증 일기장 중 하나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이해한다며 ‘어그로’를 끌지만, 떡밥을 덥썩 물어서는 안 되었다. 앨범은 이러한 게임의 규칙 자체에 대한 굉장히 수동적이지만 대담한 공격이다. 이 음악가는 ‘찐따’라고 한마디 뱉어버리고 나면 끝나는 게임, 이 ‘현실’의 바깥으로 나가길 원한다.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지 않기, 남의 눈치를 보지 않기, 일부러 강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센 척하지 않기, 잘나가는 것처럼 꾸미지 않기, 힘을 과시하지 않기, 앞날을 낙관하지 않기 그렇다고 비관하지도 않기, 과거를 그리워하고 또 미워하는 모순도 부정하지 않기, 열등감과 패배감과 자기혐오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긍정‘을 빙자해 얄팍한 위로를 건네지 않기, 자신을 사로잡는 다양한 감정들을 구차할 정도로 끝까지 파헤치기, 십대 시절의 기억과 지금의 욕망을 솔직하게 들려주기,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 파란노을의 블로그 표현을 빌리자면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인정하기.” 이것이 파란노을이 제안하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며, 그렇기에 ‘컨셉 앨범’이란 포장지는 지나치게 투명해 보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큰 탓에, 정신은 그대로지만 몸만 커버린 어른아이와도 같은 사람에 대한 앨범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미래에는 분명 세계투어를 도는 락스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21살이 될 동안 기타를 한 번도 잡아본 적 없고, 노래 실력도 형편없으며, 키와 외모도 평균 이하입니다. 청소년기를 마치고 어른이 되어 막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라이너 노트는 이 컨셉 앨범의 화자이자 주인공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앨범은 청소년기를 지나 법적 성년의 나이에 들어선 아이의 성장에 관한 것이다. 스물한 살, 즉 이십 년 남짓을 살았다고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 처음, ‘어른’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과 대답이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에 담겨 있으며, 이는 이 앨범이 전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혐오, 패배주의, 자기연민, 과대망상, 고립감, “불평과 하소연”과 같은 것들은 이 탐색의 과정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일 테다.
그렇기 때문에 기이한 것은, 이 앨범을 둘러싼 한국 리스너들의 반응에서 ‘찐따’, ‘중2병’, ‘패배주의’ 같은 말들이 이 ‘성장’의 이야기를 지워버렸다는 점이다. 영미권 리스너들의 호평이, 십대 시절에 느낄 법한 감정들과 성장통을 잘 담아낸, 오랜만에 만나는 호소력 있는 앨범임을 강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대중음악 담론이 단 한 번도 성장의 문제, 더 정확히 성장의 불/가능성과 그 조건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2] ‘찐따’, 즉 이미 존재하는 기준선에 대한 부적합(미달) 프레임이 ‘어떻게 어른이 될 것인가’ 나아가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집어삼키는 것은 매우 한국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파란노을의 앨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 리스너들은 왜 이런 현실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포함해야 한다. 이것은 지금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찐따’라는 말로는 절대 이 앨범의 중핵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파란노을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 무엇도 속이지 않고, 특별히 미화하려고도 유달리 깎아내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익명의 음악가가 허구의 화자를 내세운 컨셉 앨범 형식을 취하더라도, 2000년대 초반의 홍대 클럽이라는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거짓 추억을 소환해내더라도, 가상 악기를 통해 진짜 기타와 드럼의 질감을 모방하더라도, 여기에는 수차례 강조되는 “솔직함”이 있다.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에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논평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발견의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 앨범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또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밴드캠프의 라이너 노트에 몹시 정직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 낭만이 있었던 2000년대 초반 홍대 클럽에서 몇 안 되는 관객들과 밤낮없이 공연한 다음 하루하루를 계획 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 분명 저는 그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파란노을은 자신이 그들을 기억하듯, 이 앨범이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되고 회자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자신의 “시대착오적”인 “꿈에 대한 대답”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영향을 끼친 수많은 것들”이자, 아마도 이 앨범의 정서적‧서사적 톤을 잡는 데 주요 레퍼런스로 활용되었을, 실질적으로 여러 군데 샘플링을 넣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NHK에 어서 오세요>, <잘자 뿡뿡>,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등에 대한 언급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이 앨범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힘은 아무래도 폐쇄적인 슈게이징과 쏟아붓는 이모코어의 모순되는 충돌이겠지만, 앨범 특유의 정서를 가장 밑바닥에서 지탱하는 두 축은 “존재하지 않았던 추억”으로서의 “2000년대 초반 홍대 클럽”과 일련의 일본 서브컬처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요소가 이 앨범 전체를 기묘한 멜랑콜리(패배주의가 아니다)와 희망으로 물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구(舊)세대 오타쿠 멜랑콜리’라고 부르고 싶은 어떤 자의식에 관한 것이다.
앨범의 첫 곡 제목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덜컹거리는 전철 소리,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따온 대사(“뭐 듣고 있어?” “릴리 슈슈”)에 이어, 쿵쿵거리다 철퍽대는 드럼 소리, 또각또각 음들을 짚어나가는 건반 소리와 이 모든 것을 에워싸는 불안정한 노이즈, 그리고 “만약 이 세상이 전부 누군가의 또 다른 꿈이었다면”라는 목소리가 겹쳐진다. <아름다운 세상>의, 아니 이 앨범 전체의 정서를 응축하는 것은 이 오프닝, 바로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가져온 순간일 것이다. 전철 안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에 파묻혀 있는 아이, 하지만 그 아이에게 말을 거는 또 다른 아이의 존재로 인해 생겨난 균열, 전철의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닿지 못하는 세상. 이 균열, 이 분리의 자각이 이 앨범의 운동을 추동하는 시발점일 것이다.
아파트단지와 동네, 산과 들판과 공원과 번화가의 풍경 사진을 이어 붙인 <아름다운 세상> 뮤직비디오[3]는 이러한 감각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카메라의 시선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나지만, 거기 담긴 ‘아름다운 세상’ 속에 ‘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곳에서 바라보는 것만 허용된 누군가, 또는 깨지 못하는 꿈속에 갇혀 있는 누군가의 눈에 비치는 것들을 펼쳐놓은 것 같다. 노이즈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벽, 깨져 있는 드럼 사운드, 다른 소리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표면에서 부유하는 목소리[4]는 이 감금과 고립의 이미지를 증폭시킨다. 자아는 세상과 섞이지 못한다.
하지만 이 앨범의 화자인 ‘나’가 “자신의 망상에 갇힌 채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 앨범에서 조금은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세상살이와 멀어져가는”(<아름다운 세상>) “나 같은 놈도 먹고사”는 “세상은 아름답”(<변명>)지만, “저 밖의 세상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흰 천장>)이다. ‘나’는 “세상이 나를 등지더라도 나만은 나를 지켜주기를”(<격변의 시대>) 희망하고, “누가 뭐라 해도 내 노래는 죽지 않”고 “내일도 해는 뜨”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우리들이 사는 세상”(<청춘반란>)이라고 외치며, “세상에 순응하며” “남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스물일곱(<엑스트라 연대기>)을 떠올린다. 자아는 줄곧 세상을 의식한다. 세상은 두렵지만 또한 다정하기를 바란다.
2000년대 일본 오타쿠 문화를 특징짓는 것 중 ‘세카이계’(世界系)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소년과 소녀의 연애가 세계의 운명과 직결되고, 싸우는 소녀와 전장에서 배제된 소년이 있으며, 사회에 대한 묘사가 없는 작품들을 가리키며, 흔히 ‘세계’(世界)라는 말을 제목에 내세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2000년대 이후, “다시 만난 세계”, “네가 없는 세상은 단 하루도 없었으면 해”. “세계의 공장”, “세상이 끝나가려고 해”처럼, 한국에서 ‘세계’ 혹은 ‘세상’라는 말이 들어간 많은 노래들이 세카이계의 비슷한 정의를 따른다는 것이다. 세상(세계)은 곧 내가 사랑하는 '너'를 의미하거나, '너'와 '나' 두 사람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1998/2001년에 발표된 노브레인의 <아름다운 세상>(공교롭게도 파란노을의 곡과 동명이다)에 등장하는 ‘세상’과 비교해보면 이 노래들이 말하는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마에지마 사토시에 따르면, 일본에서 ‘세카이계’란 말이 생겨났던 초기에는, 세카이계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처럼 자신의 자의식이 미치는 범위를 세계라고 인식하는, 독백이 많은 자의식 과잉의 작품들을 비꼬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이는 니시오 이신, 사토 유야 등이 중심이 되는 문예잡지 <파우스트>(<NHK에 어서 오세요>의 작가도 이 잡지에 참여했다) 같은 흐름으로 이어졌지만, ‘모에’와 ‘캐릭터’를 내세우는 미소녀게임과 소녀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미소녀 동물원’,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게임들의 유행과 함께, 일본 오타쿠계 서브컬처에서 그 힘을 잃는다.
파란노을이 이 앨범에서 주요 레퍼런스로 삼은 것은 한때 구세대 오타쿠들을 사로잡았던 이 잊혀진, 혹은 약해진 흐름이다. 다시 소환해내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념과 이 지독한 자의식이다. 앨범에 등장하는 ‘세상’은 ‘너’가 아니다. 가사에는 심지어 특정할 수 있는 타인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2010년대에도 “위험한 세계”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처럼 더 광범위한 의미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노래들이 존재하지만, 파란노을의 자의식은 이미 소실된 흐름을 심리적 지지대 또는 상상적 동료들로 여기기에, 음악은 기묘한 멜랑콜리를 내뿜는다.
이때, 구세대 오타쿠적 자의식은 타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 자신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의 문제와 무관하다. 이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내가 있다는 순수한 감각으로부터 비롯되며, 자기를 이중화해서 바라보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와의 가상적 대립에 근거한다. '나'는 세상 속에 포함되지 않으며, 세상은 '나'의 밖에서 협상을 종용하는 비인격적‧초인격적인 힘,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 힘으로 출현한다. 그렇기에 ‘바라보는 나’는 ‘보여지는 나’와 ‘세상’의 관찰자이자 협상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의식의 존재에 대해 ‘비대한 자아’나 ‘자의식 과잉’이라고 선수를 쳐서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자의식이 실질적인 관계에서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키느냐가 논의되어야 하며, 자의식 그 자체는 죄가 없다.
이 앨범의 자의식 강한 화자는 이 가상적 대립 덕분에, 눈앞에 실재하는 ‘너’와의 관계에 집중하지는 못하지만, ‘나’를 제외한 것들의 관념적 총체로서 세상을 바라본다. 균열과 분리의 감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외부를 움직이는 힘들과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과 ‘나’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없는 것들과 자신의 자리를 생각한다. 그것이 이 앨범이 파악하는 꿈과 현실의 상호작용, 즉 ‘세상’이다. 그래서 처음은 서툴고 허술하겠지만, 이 거리감의 조절 속에서 '나'를, “우리들”을, 그리고 “우리들이 사는 세상”의 상을 짜맞추어 나간다(<청춘반란>).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가" "겁낼 필요 없”이, 어떤 비교와 과시와 억압과 비난들이 “행동”을 제약하지 않는, 자아를 옥죄는 힘들로부터 벗어난 “자유”(<I Can Feel My Heart Touching You>)를 꿈꾼다. 이렇게 자의식이 형해화된 슈게이징에 이모코어와 구세대 오타쿠적 자의식을 도입하면서, 또 불안한 스무 살의 자의식이 만들어내는 마음의 운동을 정직하게 따라가면서,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놀랍게도 그곳에서, 너무 낡은 말이 되어버린 ‘세상’을, 또 ‘자유’를 (재)발견해낸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반 홍대 클럽’이라는 “존재하지 않았던 추억”은 이 앨범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이 거짓 추억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이 ‘긴 꿈’, 이 ‘일상의 환상’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파란노을은 RYM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누구보다도 과거에 머물렀기 때문에, 지금 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싫어합니다. 과거의 제 자신조차도요. 그런 ‘환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듣고 현실을 바라봐주었으면 해요.” 하지만 이 말은 ‘솔직함’을 견지하는 파란노을의 유일한 위악처럼 들린다.
“국내 인디 음악가”들에 관한 기억, 아니 그들의 과거에 대한 ‘환상’이 파란노을이 이 앨범 작업을 시작하게 한 원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언니네 이발관, 불싸조, 조월, 모임별, 선결, 아시안 글로우, 푸른새벽, 이아직, 데이슬리퍼, 꿈에 카메라를 가져올걸, 팎, 얄개들, 전자양, 속옷밴드, 스타리 아이드, 극초단파, 넬, 그리고 내가 언급한 무명의 두 인디 뮤지션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블로그에 공개적으로 밝혔으며, 2000년대의 “낭만”을 그리워한다고 라이너 노트에 적었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근처 골방에서 홀로 레코딩을 하고 지인들에게 데모 앨범을 나눠준 뒤, 동아리에서 후배들과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는 모습. 낭만이 있었던 2000년대 초반 홍대 클럽에서 몇 안 되는 관객들과 밤낮없이 공연한 다음 하루하루를 계획 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
2000년대 초반 홍대 클럽에서 공연을 했거나 그곳의 관객이었던 사람이라면, 그런 적이 있었느냐며 웃어넘길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 경험 여부이거나 사실 여부가 아닐 것이다. “행동”을 추동하는 힘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던 추억들”이 소환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시대착오”, 실제와 무관한 “왜곡된 환상”, ‘반동적․퇴행적 노스탤지어’ 따위의 말로 치부될 수 없다. 사이먼 레이놀즈에 따르면, 노스탤지어는 “부재하는 이상을 과거나 미래에 모두 투사할 수 있지만, 대체로 지금 이곳을 편안하게 느끼지 못하는 감정, 즉 일종의 소외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개인의 욕망에 잘 맞는 시대를 타고나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게다가 현재가 폐색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직접적으로 경험한 과거와 현재로부터 지금과 다른 현재, 오지 않은 미래를 ‘현실적으로’ 떠올릴 능력을 상실한다. 다른 시간을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현재와 단절된 과거, 혹은 그 연결이 희미해진 과거 다른 사람들의 경험들을 경유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가능성들, 즉 출구가 존재할 수 있다는 명백한 증명처럼 여겨진다. 한 번 더 레이놀즈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는 현재에 부재하는 것을 비판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과거에 대한 환상/꿈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 과거에 머무르는 시간과 과거를 재료로 해서 미래를 상상해보는 시간이 없었다면, 과거가 아닌 현재에 계속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2021년이 아닌 2000년대의 어느 날에 스무 살의 자신을 위치시켜 “왜곡된 낭만”에 빠져보고 그의 인생을 시뮬레이션해보는 <격변의 시대>와 <엑스트라 연대기>가 없었다면, 하루하루는 “어제는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은 <흰 천장>의 반복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2000년대 초반 홍대 클럽에 대한 환상이 파란노을에게 지금과 다른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기 그곳에는 현재에 결여되었다고 느끼는 ‘낭만’이 있었다고 상상된다. 현실감각이라고 불리는 것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잠시 밀쳐놓을 수 있는 환경. 골방에서 홀로 레코딩에 집중할 만한 여유와 소박함.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만들고 들어주는 지인과 관객들이 만드는, 작지만 단단한 “아날로그” 공동체. 뚜렷한 계획은 없더라도 적정한 ‘선’(線)을 만들며 지속이 가능했던 분위기. 아마도 이런 요소들이 낭만의 내용을 이루는 것 같다. 이 음악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부연해 설명한다. “처음에는 현재든 과거든 상관없었지만 내가 심취했던 패배주의는 거진 과거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의 국내 인디에는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과거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패배주의 또한 낭만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둘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일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루저 정서라는 것이, 세계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를 맞이하기 전 경제적 풍요의 시대인 1990년대 영미권에서 라디오헤드의 <Creep>과 벡의 <Loser>로 대대적인 꽃을 피우고, 2000년대 한국에서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과 장기하와 얼굴들의 인기, 인터넷 루저 문화의 번성으로 이어졌다고 알고 있다. 이는 아직 실패에 너그럽고 다양한 삶의 실험들이 장려되며 비빌 구석이 남아 있던 시대, 경기침체를 겪지 않은 마지막 젊은 세대의 배부른 소리였다는 분석도 있다(물론 한국은 1997년 IMF를 겪었지만, 2000년대는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로 상징되는, 낙관적인 시대였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바뀌었다. 내 우울했던 친구들에게 조울증이 유행병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무렵이었다. 힙합과 케이팝은 화려하게 플렉스를 뽐내고, 각종 SNS에는 저마다 자기자랑으로 가득했지만, 서점 매대는 심리학과 힐링 에세이들이 넘쳐났고 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가 호황이었다. 사람들의 속 깊은 이야기는 ‘징징거림’과 ‘오글거림’과 ‘중2병’이라고, 그걸 들어주는 행위는 ‘감정의 쓰레기통’이라고 불렸다. 일베와 워마드로 대표되는 인터넷 한 켠에서는 잔뜩 날을 세우고 매순간 ‘미움의 제국’을 넓히는 전쟁을 벌였고, 씹선비, 씹덕, 진지충, 급식충, 맘충처럼 수많은 이들이 구멍이거나 벌레가 되었다. 감정 관리는 자기계발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지만, 수많은 감정들, 특히 우울은 저 멀리 추방되었다. “격변의 시대”였다.
파란노을이 꿈꾸는 2000년대는 이러한 현실의 정반대 모습으로 출현한다. 어수룩한 진지함과 진심인 몽상들, 빛나는 신실함이 있는 시대. ‘보통들’ 혹은 ‘관대한 보통’과 그 틈새가 존재하던 시대. 아마도 이 음악가는 그곳에 그들과 함께 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그곳에 있었더라면 “격변의 시대에 반기를 띄우는 동료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나 홀로 이곳에 서 있는” 패잔병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의 존재’로 세상 속에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고, 상상적 동료들은 인터넷에서조차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 같다. 이 음악가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가 바뀌어갈 때 너무나 늦은 나의 시대”(<격변의 시대>)라는 감각, 어떤 시대의 ‘마지막’이라는 멜랑콜리를 유발한다. 이는 앞서 말한 구세대 오타쿠 멜랑콜리를 포함하는 더 커다란 의미의 멜랑콜리(다시 말하지만 패배주의가 아니다)로, 이미 늦어버린, 사건의 현장을 놓쳐버린, 애초에 그곳과 연결의 끈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의 슬픔이자, 이 앨범의 정서를 가장 밑바닥에서 지탱하는 힘이다.
하지만 “무언가의 마지막은 무언가의 시작”(<Chicken>)이듯, 너무 늦게 온 사람은 너무 일찍 온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이 말을 1년 전쯤, 한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나 역시 ‘너무 늦음’의 감각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시대착오적인 꿈’을 간직했고 소홀할지언정 그것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다(그러다 보니 파란노을의 앨범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 파란노을로 시작하는 이 긴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이런 식으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떠나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라탄 것도 아니고 텅 빈 플랫폼에서 진작 떠나버린 기차의 흔적을 좇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내 얘기에 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음 기차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너무 늦게 온 게 아니라 너무 일찍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이 명민한 음악가는 이런 말장난 같지만 힘이 되는 비유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너무 늦은” 이 사람은 “아침”과 “내일”이 오는 게 두렵지만, “나 홀로 이곳에 잠들”더라도 “꿈의 다음을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격변의 시대>). “이 계절이 끝나고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I Can Feel My Heart Touching You>). 그렇게 어떤 열망, 어떤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추억들” 안에 뒤집힌 채로, “꿈의 다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었다.
어떤 시대를 경험했던 최후의 생존자가 아니더라도, 그 시기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라는 탄식은 무언가를 시작하도록 행동을 촉발하는 것 같다. 비록 그 기억조차 각색된 환상을 거친 ‘거짓’일지라도 “미완성”의 상태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고 매듭이 지어져야 하며, 그곳에서 무언가가 자라났다. 과거의 꿈에 갇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란 자기혐오와 우울, 그리고 그 곁에 ‘거짓 추억’이라고 잘못된 이름표가 붙어 있는 어떤 바람이 충돌하며 이 음악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앨범의 주제라고 파란노을이 직접 밝힌 “왜곡된 낭만에 빠진 자들의 미래”보다 ‘미래를 찾고자 하는 자들의 왜곡된 낭만’의 힘이 더 강했고, 이 앨범의 아름다움은 꿈속에서 과거와 미래가 기묘하게 뒤틀리고 자리를 바꾸고 꼬임을 만드는 순간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여러 시간을 가로지르며 우리에게 잊혀졌던 ‘미래’라는 말을 되찾아낸다. 또한 저마다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음악의 웜홀을 열어 보인다. 이 앨범의 유튜브 댓글들이 말하는 것처럼, “동아리방에서 친구들과 기타를 연주하는 당신의 평행우주”를, “지금은 사라진 홍대 서교지하보도에 서 있는 기분”을, 2021년에 스물한 살을 살고 있지 않는 내가 당신의 ‘흰 천장’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은 분명 놀라운 성취다.
이제 잊혀져가는, 한때는 힙스터픽이었던 미국 버지니아 출신의 드림팝 밴드 와일드 낫싱(Wild Nothing)의 <Paradise>라는 노래가 있다. 미셸 윌리엄스가 등장하는 이 곡의 뮤직비디오[5]는 여행을 떠난 한 여자가 공항에서 공항까지,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보여준다. 공항과 비행기라는 장소는 폐소공포증을 자극하려는 듯 근접 숏으로 비좁게 담겨 있고, 빈티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던 여자는 유리창 바깥의 구름들을 바라보다가 잠이 든다. 그리고 광활한 대자연, 시시각각 빛깔이 바뀌는 하늘과 물줄기가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마주하고 신비한 황홀감에 젖지만, 꿈에서 깨니 이곳은 공항이다. 출발한 곳과 다를 바 없다. 이 특별할 것 없는 뮤직비디오를 언급하는 것은, 이것이 2010년대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드림팝(슈게이징의 이웃)의 핵심적인 감각을 암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 뮤직비디오가 보여주듯, ‘꿈’에 상응되는 드림팝은 꿈속을 부유하듯 리얼리티가 희미해진 시대의 산물이라기보다, ‘공항’ 및 ‘비행기’의 연장선일 폐쇄된 세계의 반대편에서 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드림팝을 연상시키는 것은 초점이 맞지 않거나 빛바랜 빈티지 스타일의 몽롱한 이미지지만, 오히려 진실은 세계에 갇혀 있는 무기력한 주체에 있는 것 같다. 자유와 해방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던 여행조차 더 이상 그것을 담보하지 못한다. 전세계의 공항은 물론, 도시들은 그 차이를 상실한 채 서로 닮아가고 공간은 평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창 바깥으로 역동하는 세계를 지켜보는 사람의 감각, 또는 교통수단을 포함해 무수한 미디어들 내부에 갇힌 사람의 감각이 먼저고, 이것을 닮은 동시에 벗어나려는 양가적인 움직임이 드림팝, 즉 꿈의 음악을 불러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폐색감과 출구 없음의 감각이 코로나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을 때, 활동을 멈춘 전세계가 거대한 꿈속에 잠들어 있을 때, 파란노을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제때 제시간에 도착했다.
로컬 인디씬에도 마찬가지다. 2010년대 인디씬에서 유행했던 드림팝뿐만 아니라, 작년 인디씬의 중요한 곡들을 특징짓는 이미지 역시 ‘꿈’이었다. 음악가들은 “그댄 왜 꿈에 찾아”(<그대의 꿈결>)오냐고 묻고, “끊임없이 잇따라 꿈속에서 나 [노래를] 불렀”(<75데시벨>)으며, “파란 꿈결 사이로 들어가 구름이 된 걱정 사이를 헤치고 네 이마에 쪽 입을 맞췄”(<꿈속에서 걸려온 전화>)다. 하지만 꿈속에 더 오래 거주하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픈 꿈이 끝나면 아픈 기억들도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고, “긴 어둠 속 상상만 했던 너를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너는 계속 내게 신호를 보냈고 이제 눈을 뜨고 네 앞에 전활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어떻게 이 질식할 것 같은 꿈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다음”을 볼 수 있을까. 꿈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세계를 살아나가야 할까. [6] 여러 음악들과 더불어, 파란노을의 이 앨범은 결코 만만치 않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파란노을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이 앨범이 가장 멀리 나아갔기 때문은 아니다.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방법으로, 또 자신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일 자유와 미래의 감각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끝>
[1] 영미권에서 먼저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파란노을에 대한 열광은 오리엔탈리즘의 변종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서구의 마이너한 음악들을 재현해내는 아시아 변방 음악가에 대한 환상, 또는 열등한 남성성을 아시아 남성에게 할당해버리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RYM에 호의적인 리뷰를 한 이들이 대부분 ‘애니 프사’, 즉 인종을 막론하고 서구에서 일본문화를 향유하는 주변부 취향이라는 점과 연결할 때, 이 견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2] 영화와 소설과 시 담론은 이미 이에 대해 무수히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작년에 '비적응'이란 제목의 EP를 낸 새소년을 비롯해,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음악가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는 대중음악 담론이 사유 불능의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성장'이란 말이 '청춘'이란 말처럼, 손쓸 수 없이 오염되어서 포착해낼 수 있는 것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인지도 모른다.
[3] 특히 <청춘반란>은 코인노래방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것 같다. 모순되고 복합적인 감정들을 담아내는 이 앨범에서 이 곡은 상대적으로 평면적이고 단순명쾌한 감정을 표출하며, 그렇기 때문에 매우 이질적이고 코믹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4] https://youtu.be/gb9Qqt75rzg
[5] https://youtu.be/zm636VSQXUU
[6] 폐색감을 불러일으키는 세계를 부감하듯 재조명하거나, 낡은 세계를 찢고 재감각하려는 움직임은 셰임, 블랙컨트리뉴로드, 스퀴드 등 최근의 영국 포스트펑크에서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