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 현장에서 느끼는 K팝의 열기
짙은 구름을 뚫고 하강한 지 10분 만에 비행기는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에 둥근 발을 내디뎠다.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진 후 승객들은 줄지어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이들의 뒤를 따라 공항에 발을 내딛자 습한 기운이 몸 아래에서 올라왔다. 한국의 겨울 날씨에 익숙해졌던 몸은 타이베이의 더운 기운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1년 사이에 해외 콘서트 출장으로 아시아 국가 3곳을 다녔다. 같은 아시아 문화권이지만 공항에서 숙소로 갈 때면 그 도시의 첫 얼굴과 만나기 마련이다. 올해 두 번째 방문한 타이베이는 어느 도시보다도 한국과 비슷했다. 어지럽게 펼쳐진 간판 속 중국어 간판만 가리면, 한국의 도시들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태프들을 태운 승합차가 숙소를 향해 40분 동안 내달리는 동안 차 안은 적막 했다. 팀마다 다음 날 있을 콘서트 일정을 확인하거나 숙소에서 할 일들을 정리하는 듯했다. 출장이 여행과 가장 다른 점을 꼽으라면 일정 내내 온통 업무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시시각각 현지의 상황을 스태프마다 각 팀에 보고해야 하니 한 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타이베이 가면 망고젤리 사와." 주말에 타이베이로 출장을 간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는 부럽다며 기념품을 사오라고 부탁했다. 황금 같은 주말 동안 일을 해야 하는 내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아 하는 말에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망고젤리는 무슨 망고젤리, 힘들어 죽겠다." 기획사의 모든 일정은 아티스트에 맞춰진 탓에 동행하는 스태프들의 일정은 빠듯한 편이다.
숙소에 도착한 후 단출한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아니 그대로 뻗어버렸다. 2시간 20분의 비행시간은 다른 국가로 이동할 때보다 짧은 편이었지만, 습하고 더운 나라에 도착하니 그 자체로 힘겨웠다. 8개월 전 타이베이 일정 때에는 몸살을 앓았다. 추운 날씨에 있다가 더운 나라로 갈 때면 몸이 말썽이다. 이번에도 타이베이는 내 마음의 친숙함은 무시한 채 나를 밀어내는 듯했다.
무거웠던 몸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아침 일찍 산책을 하고, 조식을 먹으려는 계획도 엉망이 됐다. 눈을 뜨자마자 그동안 아티스트의 콘서트 등 주요 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오전부터 콘서트장으로 출발해야 하는 일정이어서 부랴부랴 있는 대로 찾아봤다. 콘서트 리허설부터 준비해도 문제는 없으나, 사전에 정보들을 알아보고 현장에 가야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짧은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어떤 거 드실래요? 팬들이 선물한 건가 봐요." 공연장에 도착해 스태프 사무실로 이동하자 다른 팀 과장님이 팬들이 선물한 공차가 있다며 물었다. "저는 다 잘 먹어요." 결국 과장님이 드시는 같은 공차를 받아 들었다. "오, 진짜 맛있어요." 좀처럼 음식이나 음료의 맛 평가를 하지 않는데, 타이베이에서 맛본 공차는 말 그대로 '인생 공차'가 됐다. 정신없이 큰 빨대로 공차를 마시다가 그제야 뚜껑에 붙은 가수의 로고와 응원 문구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낯선 타국에서도 가수들을 향한 팬들의 마음들이 공차를 통해서도 느껴졌다.
대강 짐을 푼 뒤 공연장 주변을 둘러봤다. 평균 기온 20도가 넘는 날씨에도 벌써부터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미리 양산을 준비하고 자리를 잡은 이들도 보였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맺히는 날씨인데도 팬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콘서트 입구에는 가수의 사진으로 제작된 포토존도 설치됐는데, 공연 시간이 5시간 남았는데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붐볐다.
공연 5시간 전 리허설이 진행됐다. '아이돌 가수'라고 하면 부정적인 시선들이 있었다. '얼굴, 몸매나 잘났지 실력이 없다'라는 게 주된 비난이다. 하지만 실제로 가수들이 콘서트를 준비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런 말을 하기 쉽지 않다. 가수들은 현장 상태를 확인하면서 무대마다 동선, 멘트는 물론 카메라 위치까지 세세하게 살핀다. 이와 더불어 공연을 함께하는 안무가들과 의견을 주고받는다. '아이돌 가수'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쉼 없이 노력한다. 그렇게 해야 하루에도 몇 팀씩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2시간 남짓 진행된 리허설 이후 관객들의 입장이 시작됐다. 관객들의 손에는 공식 응원봉과 더불어 가수들의 얼굴로 만들어진 부채, 응원 플래카드들이 들려있었다. 공연장 밖에서는 팬들이 직접 만든 응원 도구, 기념품들을 주고받았다. 현지 팬클럽이 응원 물품을 나눠줄 때면 자연스럽게 줄이 이어졌다. 옆에서 또 다른 물품을 나눠주면 팬들은 곧바로 뛰어가서 줄을 섰다. 줄이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상황에 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관객들의 오랜 기다림 끝에 가수가 무대에 올랐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목청껏 외치는 함성은 공연장 지붕을 때리고 다시 공연장 바닥을 쳤다. '뜨거운 함성'이라는 표현이 딱 알맞았다. 누군가를 위해 외치는, 조건 없는 애정 표현이다. 그 순간만큼은 이 곳이 타이베이인지, 한국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외국 공연장에 한국 가수가 무대에 오르고, 현지 관객들이 한국어 '떼창'을 하는 모습은 더욱 생경하다. '어떻게 이런 가사까지 알까' 싶다. 후렴구는 물론 정신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구간에서도 정확히 한국어 가사를 부루는 것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K팝'을 주제로 다룬다. 그 현장을 직접 본다면 단순히 소식으로 접하는 것 이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이 사는 곳의 콘서트장에서 울려 퍼지는 한국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유명 팝가수가 부럽지 않다.
콘서트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쯤, 문뜩 지난여름 다른 가수의 방콕 콘서트가 떠올랐다. 어머니와 콘서트에 함께 온 소녀는 당시 한국에서도 인기 있던 귀가 길게 늘어진 동물 모양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공연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을 때 소녀는 어머니의 곁에서 나와 가만히 서서 공연을 바라봤다. 우연히 그 뒤에서 있던 나는 잠시 동안이지만 그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한국 가수의 콘서트를 보고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소녀에게 오늘은 어떤 날로 기억될까'. 가만히 무대 쪽을 응시하고 있던 소녀는 무대가 공연이 끝나자 환한 얼굴로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 안겼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이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라도 이날을 꼭 기억하길 바라며, 나 또한 지금의 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길 바랐다.
잠시 지난여름의 콘서트 열기를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본 공연이 끝났다. 타이베이 관객들은 핸드폰 불빛을 켜놓고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콘서트 무대에 오른 가수의 히트곡을 반주 없이 부르기 시작했다. "앵콜! 앵콜! 앵콜!" 무반주 떼창 사이에 앙코르 요청이 쏟아졌다. 그렇게 5분이 지났을까. 침묵을 깨는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고 가수들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와아아!' 현지 팬들의 함성이 다시 귀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