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홉수 Dec 21. 2022

누구나 2장의 티켓을 갖고 있다

죽음과 삶, 서로 등이 붙어있는 한 장의 티켓

 '인생은 오롯이 내 뜻대로 되진 않는다.'

 2022년을 떠나보내면서 드는 생각이다. 제 아무리 그럴듯한 계획이 있어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고, 반대로 생각지도 못한 일도 일어난다. 지난봄 아버지를 코로나19로 그렇게 떠나보낼지도 올해 1월 1일에는 생각이나 했을까.


 누구나 2장의 티켓을 품고 태어난다. 삶과 죽음이 그것이다. 태어날 땐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부모를 통해 얻은 삶 또한 의지로부터 시작한 한 장의 티켓이다. 그 티켓을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찰나의 여정이 결정된다. 


 문제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 한 장의 티켓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내일도 오늘처럼 아침에 눈을 뜰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그저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뻔하디 뻔한 일상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한 영화가, 연극이 끝을 향해 달리는 것과 같이 티켓 사용 시간은 유한하다.


 누구나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끝을 맞이한다. 이 또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간혹 스스로 그 끝을 결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결과만 그럴 뿐이지 그 과정에서는 자신이 손 쓸 수 없는 과정들이 많을 테다. 이것이 마지막 남은 두 번째 티켓이다.


  태어나고 사라짐에 있어서 각각 한 장의 티켓들은 사실 서로 등이 붙어있는 한 장의 티켓과 같다. 더 많은 티켓을 갖고 싶어도 늘릴 수 없고, 굳이 하나를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가 없다. 사람에게는 딱 2장씩만 정해져 있다. 공평해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다.


 나 또한 부모님이 만난 덕분에 티켓 한 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방황'이라는 핑계로 내 품에 있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당시에는 '죽음'은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그저 결국에는 나에게 올 것이라는, 추상적인 그림자였다.


 아버지를 잃은 후에야 죽음은 삶에 숨이 막히도록 가까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의 부재는 내가 느낄 수 없으나 가족의 부재는 잊을 만하면 불쑥 나타났다. 그저 길을 걷다가도, 창문을 바라볼 때도 예고 없이 나에게 티켓을 쥐어준 부모의 부재는 어디에나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한 장의 티켓만이 이제 내 주머니 속에 있다. 언제 이 한 장이 쓰이게 될 건지는 들고 있는 당사자도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만 남는다. 굳이 일상의 나태함이나 사그라져 가는 것에 대한 까마득한 두려움은 큰 의미가 없다. 


 그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 마지막 남은 티켓 하나를 내어주었을 때 후회가 없기만 하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에서는 엄마, 밖에선 형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