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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Apr 22. 2019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현재 직장의 전 팀장이자 그전부터 알고 지냈던 선배가 퇴사한 지 3달이 흘렀다.  금요일 밤, 오랜만에 선배를 만난 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술을 퍼마셨다. 덕분에 숙취로 달갑지 않은 토요일 낮을 맞이했다.

 늦은 점심을 먹을 겸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와 TV를 틀었다. 핸드폰 배달 어플로 메뉴를 고를 때쯤, 누군가 대문을 칼로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숙취에 섞인 TV 잡음인 줄만 알았지만, 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술자리의 즐거움에 비례하는 숙취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신경을 건드리는 소리에 짜증이 치밀었다. 동시에 대문을 건드리는 수상한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올라왔다. 짜증과 긴장이 뒤섞인 묘한 감정으로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었다.  

 "죄쏭함니다(죄송합니다). 도색 중이에요. 양애 부탁뜨려요(양해 부탁드려요)."

스무 살쯤 됐을까. 누가 봐도 앳된 얼굴을 한 청년은 대문 안 속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사과부터 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어눌한 말투에 다시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커졌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청년의 말을 되새겼다. '죄송합니다' '도색 중이다' '양해 부탁드린다'. 세 문장은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조합됐다.

 "아, 네…."

 제대로 상황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나는 짧게 답을 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이상하리만치 상대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스무 살 청년이 도색을 열심히 하고 있구나'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도색 작업 공지를 내가 읽지 못한 건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다시 대문을 긁는 소리가 나는데도 자연스럽게 상황은 종료됐다.

 거실에 앉아 청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려 보이지만 멀끔한 차림. 몸이 불편해 말투가 어색한 건 아니었던 듯했다. 다시 문을 빼꼼히 열어 청년에게 물었다.

 "도색 작업 중이신가요?"

 "네, 죄쏭함니다. 양애 부딱뜨려요."

 "수고하세요."

 어색한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도 모르게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두 번째 들은 말투로 봐서는 한국으로 유학 온 중국 대학생이거나 조선족 출신 학생인 듯 보였다. 상대에 대해 자세하게 물어보는 건 실례가 되는 것 같아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공손한 표현은 그대로 담긴 청년의 말에 문뜩 나의 스무 살이 스쳐 지나갔다. 숙취 만큼이나 부끄러웠다. 청년에 대해 아는 건 없었지만, 최소한 나의 스무 살 때보다는 무언가를 위해 건실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문을 긁는 소리는 붙어있던 오래된 스티커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3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페인트 냄새가 거실로 스며들었다. 배달 음식을 시키려는 마음을 접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라면을 끓였다. 왠지 모르게 음식 배달로 청년의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라면으로 남아있던 허기를 달랜 후 TV를 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깼다. 부랴부랴 저녁 약속을 위해 나갈 준비를 한 뒤 문을 나서 1층을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페인트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시선은 대문으로 향했다.

 '지금은 다른 집 작업을 하고 있으려나….'

도색은 꼼꼼히 잘 끝났다. 대문을 보며 스무 살 청년이 떠올랐다. '음료수라도 한 잔 건네줄 걸'이라는 아쉬움이 스쳐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죄송합니다' '도색 중이다' '양해 부탁드린다' 세 문장이 다시 뭉쳐졌다. 그 청년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잘 해내 것 같았고,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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