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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Mar 24. 2019

34세 봄,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1986년생. 올해로 벌써 34세다.

아버지가 31세에 결혼하고,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내 나이는 벌써 아버지가 결혼한 나이를 지나 내가 태어난 나이가 됐다.

한국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는 아버지와 장난치는 모습도 있지만, 초등학교(입학 당시에는 국민학교) 입학 이후에는 부자의 관계에는 거리감이 생겼다.

조금씩 수염이 자라고 세상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했을 때, 흔히 말하는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감정적으로 아버지와 자주 부딪혔다. 

'성질이 외곬으로 곧아 융통성이 없다.'  '고지식하다'의 사전적인 의미처럼 나와 아버지는 똑 닮은 고지식한 성격이었다. 아들이 아버지가 닮는다 해도, 나쁜 점도 닮는다 해도, 닮아도 너무 닮은 부분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기준이 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지식한' 두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갈등은 다수롭지 않은 일들 때문에 종종 터지고 말았다.

컴퓨터가 자주 고장난다는 이유로, 하지 않은 거짓말들을 했다는 이유로…. 당시에는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나름대로 '아들이 바른 길로 가지 않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반대로 내 까탈스러운 면도 아버지와 갈등을 키웠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항상 안테나가 세워져 있는 듯 예민한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나와 무뚝뚝한 아버지. 서른이 넘어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나와 아버지는 '너무 닮아', '너무 닮지 않아' 서로에게 가까워지지 못했다.


사회 생활 7년차가 된 2019년. 올해 초에 술에 취해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내뱉어버렸다.  부(富)에 대한 한탄이었다.  뜨거운 취기와 섞인 말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갈아놓았을 것 같다.

'왜 우리집은 경제적으로 빠듯해야 하나' '경제 성장기에 아버지는 무엇을 한 것이냐' 하나 같이 아버지의 가슴을 후펴파는 말들이었다. 어린 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나에 대한 나름의 변호를 해보면, 사회에 나가 만난 선후배 동료들의 삶은 나의 그것과 달랐다. 마냥 '모자람 없는 조건 속에서 충족한 지원'을 받은 듯했다. '지원'이라는 말 속에는 어릴 때부터 부를 어떻게 키우는 것인지를 아는 과정도 있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이 있었고,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순간마다 표현은 안 했으나 어느덧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남을 속이며 살진 않았다'라는 말 뿐이었다. 핑계 같은 말에 화가 났다. 모자람을 채우려는 공허한 말로만 들렸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집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늘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이제 술을 좀 줄이라'는 만류도 듣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나대로 자꾸 현실을 밀어내기만 하는 아버지가 미웠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아버지가 혼자 술을 마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아버지를 못 본채 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식탁에 앉아도 수저가 그릇을 치는 소리만 흘렀다.  


어느 날 문뜩 내 나이가 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나를 낳은 나이를 지났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를 원망하진 않았을까.' 

아버지가 고향에서 지내다가 서울 근처로 올라온 후 어머니와 결혼했다. 경제 상황이 변변치 않았던 아버지는 공장일을 하고, 청계천에 있는 아파트에 들어가 밤낮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치면 '투잡'을 했다. 회사에서 퇴근 후 아파트 복도에서 청사초롱 원단을 재단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부모님은 나와 여동생을 모자람 없이 키웠다. 두 분이 젊었을 때는 경제 호황기였으나 IMF 사태 등 만만치 않은 어려움도 있었다. 평생을 살면서 '집에 돈이 없다'라든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다'라는 말은 들은 적 없다. 나중에 여동생에게 들은 건데, 어머니가 여동생에게는 자주 그런 말을 했더라. 항상 여동생에게는 미안하다.


그래서 난 아버지를 내 마음 속에서 용서하기로 했다. 아니, 처음부터 '용서'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은 표현이었다. 이 단어는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것과 같다. 철 없었던, 지난 날의 나를 내가 용서하는 것이다. 이제는 조금 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그와 똑 닮은 나를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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