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홉수 Dec 26. 2022

쓸쓸함을 채울 수 없는 고독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운 사람이 있다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우이동 등산로 초입에 있는 한 주점을 찾아갔다. 어머니는 일요일에 가끔씩 아버지와 이 주점에서 막걸리를 한 잔씩 하셨다고 했다. 나는 처음 가본 곳이었다. 새삼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라도 부모님과 오지 못해 아쉬웠다.


 크리스마스 낮 시간대여서 그런지 손님은 어머니와 나 둘 뿐이었다. 어머니는 메뉴판을 훑어보시다가 "아버지가 좋아했던 안주"라며 파전과 동동주 대(大) 자를 주문했다. 귓불이 찢어질 듯한 추위는 조금 물러간 날씨였으나 어머니와 나는 주문 후 잠시 아무 말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봤다. 


 손님이 없었던 탓인지 금세 파전과 동동주가 나왔다. 적막함을 뚫고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았다. 주홍빛을 내는 히터가 자리에 바짝 붙어었어서인지 동동주 한 잔만으로도 취기가 돌았다. 창밖으로는 며칠 전 내렸던 아직 녹지 않은 눈이 가지에 엉겨 붙어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천장부터 벽, 바닥까지 나무로 지어진 주점 내부는 곳곳에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안주나 분위기나 아버지가 자주 찾을만한 단골집이었다.


 어머니는 막걸리를 드시다가 사장님이 보이자 "남편과 함께 자주 왔던 곳이에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아들하고 처음 왔어요"라며 반갑게 인사했다. 사장님은 손님을 알아보진 못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남편과 자주 왔던 술집을 다시 찾은 것이 그저 반가웠으리라. 


 어머니는 아버지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대부분은 아버지가 계실 때에도 듣던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결혼 당시 힘든 이야기를 어느 정도 건너뛰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는 상가에 딸린 작은 월세방에 살던 시절부터 시댁식구들에게 들었던 모진 말들까지 어제 일처럼 설명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일하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생각했다. 요즘에는 부부끼리도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고 하던데 부모님은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항상 함께였다. 그만큼 싸울 일도 많았지만, 주말이 되면 이렇게 단골집을 찾아가는 재미도 나눴다. 그러고 보면 부부의 삶이라는 게 한 문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관계인 것 같다.


 시간이 흐르자 주점에는 손님들이 두 테이블 더 들어왔다. 50대 초반 부부 정도로 보이는 분들 중에 남자분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전화를 걸어 상대방에 욕설을 해서 다른 손님들도 눈살을 찌푸를 정도였다. 안 되겠다 싶어 조용히 사장님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남성분은 사장님의 제재에 오히려 마시고 있던 맥주잔을 테이블에 '꽝'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화를 냈고, 분풀이 대상은 내가 됐다.


 어머니가 내게 참으라는 말을 조용히 건넸다.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는데, 그 남성분은 형제 자식들에 대한 서러움을 열변을 토했다. 사실 어이가 없었다. 화낼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 남의 아픔보다 자신의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분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해도 허망하게 코로나19로 아버지를 잃은 것보단 나아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번에는 내가 일부러 크게 목소리를 내가며 지난 6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 남성분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옆까지 와서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고아"라며 일찍이 부모님을 여읜 이야기를 잠시 동안 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난 뒤에도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나눴다. 취기 때문인지, 남편이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지 꾸역꾸역 눈물이 흘렀다. 그 뒤로 두 분이 주점을 나가면서 우리 테이블의 계산도 했다고 사장님이 전했다.  


 아들에게 남편이 떠난 쓸쓸함을 털어놓은들, 형제 자식 때문에 화가 나 술을 퍼부어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들.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서운해하는 감정을 어떻게 채울 수는 없다. 어머니의 쓸쓸함을 채울 수 없는 나의 고독 또한 누구도 채워줄 수는 없다.

작가의 이전글 N잡러로 살아간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