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워라밸을 찾아서

그렇게 나의 워라밸은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다가왔다.

by 이나

그러니까, 이 모든 사단의 시작은 워라밸이었다.


직장생활 15년 차쯤 되자, 초과근무수당도 없는 야근에 점점 지쳐갔다.

월화수목 내내 전력질주하고 나면 금요일 오후쯤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토요일 오전엔 금요일에 못 끝낸 일들을 다시 들여다봐야 했고,

일요일 오후엔 “지금 조금이라도 해두면 내일의 내가 고마워할 거야” 같은 생각으로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그럼에도 이 삶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럭저럭 괜찮은 월급과 (물론, 야근수당까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

나름 그럴싸한 외국계 회사들의 이름값, 그리고 좋은 동료들 덕분이었다.

늦은 밤이나 주말에 메신저 초록불이 켜진 동료들을 발견할 때 드는 그 감정은 거의 전우애에 가까웠다.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고된 삶이 결국 나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랬다.

몇 번의 이직을 거치며 연봉을 올릴 수 있었고,

그 과정은 나에게 “내가 열심히 살아온 시간이 보상받고 있다”는 착각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보상의 끝은 언제나,

더 강도 높은 야근이었다.



시간을 갈아 넣는 만큼 내 성장은 멈춘 듯했고, 익숙해진 업무에 점점 지루함이 밀려오던 무렵,
그분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6~7년 전,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분.

그때 그분은 부장, 나는 과장이었고,

부서는 달랐지만 그분이 주도하던 여러 프로젝트를 내가 지원하면서 인연이 생겼다.

서로의 이직 후에도 명절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연락은 이어졌고,

운이 좋게도, 나에 대한 인상은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성실함, 꼼꼼함, 가끔 발현되는 통찰력까지. (실제로 그분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작년, 그분이 있는 부서에 새로운 포지션이 생겼을 때, 나에게 직접 연락을 주셨다.

나에게는 전혀 익숙지 않은 업무였지만,

그분은 내가 얼마나 적임자인지, 이 기회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 모든 설득보다도 내게 꽂힌 단 하나의 단어는 바로 “워라밸”이었다.


“워라밸 챙겨줄게요.”

15년 직장 생활 동안,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 있었던가?

면접을 볼 때마다 들었던 건 오로지,

“업무 강도 센데 괜찮겠어요?”

그리고 나는 늘, 당당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런 업무 환경에서 일하는 건 익숙합니다.”

그런데, 먼저 워라밸을 이야기해 주다니.

게임 끝이다.

연봉을 동결해서라도 워라밸을 누리고 싶었는데,

업무가 낯설든 말든, 통근 시간이 좀 늘어나든 말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건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분이 나를 추천했지만 외국계 특성상 채용 절차는 깐깐했다.

여러 번의 면접, 다양한 인터뷰어, 그리고 PT 테스트까지.

나 정도면 스카우트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힘들 줄이야…

중간에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합격 후 맞이할 워라밸의 낙원을 상상하며 버텼다.


그리고 몇 번의 이메일을 통해 오고 간 연봉협상에 이어 드디어, 합격.

자, 이제 다들 궁금하실 거다.
“그 워라밸, 실제로 존재하긴 했을까?”

수습 기간엔 재택근무가 없다는 말에 잠깐 실망했지만,

초반엔 사무실에 나가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소통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평소 재택하던 날 해오던 오전 운동은 당분간 저녁이나 주말로 옮기기로 나 자신과 타협했다.

어차피 그래봤자 3개월이니까.

어쨌든 이젠 6시에 퇴근하고, 집에서도, 주말에도,

노트북을 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설렘에 너무 행복했다.


내가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이 정도 보상은 받아도 된다고 나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물론, 가끔 야근도 하는 성숙하고 숙련된 직장인다운 모습도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관대해진 상태였으니까.


출근 첫날 그분은,

회사에 초과근무수당제도가 있긴 하지만 굳이 그런 건 쓰지 말라고 하셨고,

나는 천진하게 되물었다.


“아하, 네! 어차피 제가 근무시간과 업무를 유연하게 조절하면서 하면 되니까요. 맞죠?”

그분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그 정도 융통성은 있다고.

그렇게 나의 워라밸은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다가왔다.

스트 이프 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