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아

예민한 감각이 느릿하고도 분명하게 맞닿는 시간, 한강 <희랍어 시간>

by 이나

※이야기의 결말을 일부 담고 있습니다.



느슨한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벌써 만으로 네 해째 지속되고 있다.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역시 '느슨함' 때문이다. 책을 다 못 읽어도 함께 토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듣는다. 텍스트를 매개로 한 토론은 생각 보다 별 게 아니다. 지속적으로 읽을 계기가 되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읽기의 의미를 확장하고 나의 사유 역시 조금이나마 넓혀본다. 아마 나는 이 모임이 아니었으면 인문학서와 문학서를 1년에 한 두 권도 겨우 읽는 사람이었겠지.


11월과 12월에 걸쳐서는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함께 읽었다. 모임에서 함께 읽는 한강 작가의 책으로는 두 번째 저서이다. 올 초 쯤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함께 읽었다. 여전히 눈으로 뒤덮인 산과 죽은 새의 이미지가 생생하다. 한강 작가가 최근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함께 하나 더 읽어보자는 얘기가 나와서 <희랍어 시간>으로 선정했다. 모임에 속한 분들이 공통적으로 읽지 않은 책이기도 했고(나는 십여년 전에 읽었는데 사실 내용과 감상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읽기의 난이도 측면에서 비교적 수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분량도 그렇게 많지 않고.



<희랍어 시간>은 참 더디다. 책 속의 인물들에게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그들의 하루는 별일이 일어나지 않고 사건도 몇 가지 없다. 그들의 일상은 정돈되어 있다. 의도적인 정돈인지 어쩔 수 없는 정돈인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여튼 두 사람은 하루에 일정을 빼곡히 채워 사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고, 스케줄은 늘 비슷하다. 아마 입는 옷도 먹는 것도 비슷할 것이다.


여자는 말을 잃었고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미 거의 보이지 않는 지경이다.

남자는 흐릿하게 덩어리진 물체로만 세상을 인식하고 처방전을 통해 맞춘 안경을 쓰고야 눈앞에 바싹댄 글자만을 읽어낼 수 있다.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는 세계. 안경이 없으면 볼 수 없는 세계. 그런 세계를 살고 있다.

여자는 소리를 잃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로 내뱉을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말을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책을 모두 읽었지만 여전히 그 이유를 명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원인을 알고 해결하는 것이 그녀에게나 내게나 이 책을 읽는 데에 중요할까. 그녀는 마지막 장까지 소리를 밀어낼 수 없었다. 분명하게 하고 싶은 말이, 반드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음에도.


두 사람은 사랑일까? 연인이 될까? 앞으로의 두 사람의 관계는 성애적인 무언가일까?

토론에서 내가 던진 질문에 지금부터 시작될 사랑의 징조로 마지막 장면을 해석하는 이도 있었다. 재미있게도 남자가 처음부터 여자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해석도 있었다. 자신의 수업에 들어온 말을 않는 여자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먼저 말을 걸고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 읊어대는 것이 모두 그의 관심과 사심(?)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무척 재미있었다.



Photo by Young Shih on Unsplash


잃어버린 말을 찾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여자.

희랍어를 잘하는 아시안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성장기를 보낸, 희랍철학을 공부하기로 선택한 이유가 죽음을 자신이 일상적으로 경험해 사유에 대한 아레테를 지녔다고 설명하는 남자.


두 사람은 (아마도) 삼십대 후반 쯤이고, 혼자 살며, 어떻게 보면 견디며 삶이 주는 시련을 감내하며 살아 가고 있다. 깨어진 안경과 다친 손으로 혼자서는 약국도, 병원도, 안경점도 갈 수 없는 남자의 손바닥에 바투 깎인 손톱으로 손가락 끝이 눌러 쓰는 글자는 아마 오랜 어둠 끝에 겨우 맞닿은 기척이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를 영영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엄마랑 있어도 돼'라는 말도 한 마디 할 수 없는 여자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가 줄줄 흐르는 사람은 어찌 보면 위안일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어쩌면 일시적으로) 말을 할 수 없으며 잘 들을 수 있고 수어는 모른다는 것을, 그녀에게는 아이가 있다는 것도 하나도 모르면서 그녀에게 가 닿았다. 두 사람은 부족한 감각 또는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을 가진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안았다. 그것 사실만이 이 책의 결말부에 선명히 적혀있다.


이 다음이 이전까지의 삶과의 다른, 새로운 챕터일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보듬을 수 있지만, 동시에 잘 알기에 가장 날카로운 방식으로 상처를 헤집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어둠은 어둠을 알아보는 법이지만,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의 내일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예상은 일견 안일해보이는 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사람이 각자의 삶을 나름대로 꾸려나가기를 바란다. 희망의 이름으로 걸어나가길 바란다. 조용히 견디며 사는 삶이 아닌 때로는 힘차게 달려나가는 순간이 있기를, 큰 소리로 웃는 장면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건 두 사람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은 일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닿았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4월 마지막 주의 아티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