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이 필요해

형님과 머슴

by INA

“나는 머슴이 필요해” K가 말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부류에는 두 가지가 있어. 머슴처럼 일하는 사람과 나처럼 편하게 입으로 사는 사람."

그는 눈앞의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거침없이 이어서 내뱉었다. “나는 일개 직원들과 말 섞을 필요도 없어. 한 달에 한 번 사장 만나 점심 먹고 보고하면 끝이지. 사장도 내 혓바닥에 놀아나는 사람일 뿐.”

자신의 말에 수긍하듯 끄덕거리며 어깨를 쭉 펴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그쪽으로 기울었다.


이내 K 밑에서 일하던 L이 무너졌다.

‘머슴’이란 말은 L이 스스로 내뱉었던 단어이기도 했다. K가 일러준 적도 없는데 그는 이미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인지하고 있었다.


4년 전, L은 "따라오면 나중에 사업할 때 도와주겠다"는 K의 말을 믿고 형님처럼 모시겠다 다짐하며 부지배인으로 들어왔다. 사업에 필요한 경험이라는 말에 시키는 대로 묵묵히, 때로는 나서서 도맡아서 처리했다.

K는 운영을 위해 인건비를 아껴야 한다며 L에게 야간 근무 직후 곧바로 주간 근무를 붙이기도 했다.


어느새 L은 무기력해졌다. 사업 의지는커녕 그 일조차 흥미가 없다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쉽게 그만두지 못한 건, 부지배인이라는 직함의 달콤함 때문이었을까?

스스로 ‘머슴’을 자처한 탓인지, 다른 직원들도 자신의 말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불평도 했다. 그 직함은 현실에선 자기 암시에 불과했다.

혹사를 시켜야 할 ‘머슴’이 무기력해지자, K는 곧 다른 ‘머슴’을 찾기 시작했다.


"형님... 더는 못 버티겠습니다."

위로를 기대했지만, 그날 저녁 K는 사장에게 먼저 보고했고 다음 날 직원들에게 "L이 곧 나간다"라고 흘렸다.

L의 말은 상담이 아니라 사직서가 되었다.


이윽고 또 다른 머슴이 들어왔다. 모든 이들이 ‘사람 좋다’며 칭찬을 했다.

좋은 사람이라...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는 말처럼 들려 씁쓸했다.


다산 정약용의 글이 떠올랐다.

위는 능멸하고 아래는 농간을 부린다. 만만하게 보이면 사람들은 기꺼이 오만해진다.

그럼에도 '먹고사는 일'에 매여 전전긍긍한다면, 그 자리조차 지키지 못한다.


어쩌면 빠져나오는 길은 단순하다. 사심을 거두고 툴툴 털고 떠나는 것.

머슴이 필요하다는 사람을 떠나, 주인이 되려는 마음으로.


다산 정약용
윗사람이 나를 능멸하고 아랫사람이 나를 농간 부리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업신여기는 데도 먹고사는 문제에 붙들려 전전긍긍한다면
그 자리조차 지킬 수 없다
전전긍긍을 버리려면 내 사심을 버려야 한다
벌떡 일어나 툴툴 털고 떠나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지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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