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18세기 철학자도 아니고 21세기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조금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고등학생 때 야자실 책상 앞의 나는 항상 이런 공상들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이지? 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는 거지? 여기 갇혀 있으면 공부가 잘 되나? 공부를 잘하면 또 뭐가 좋지? 좋은 대학에 가서 인생 성공하는 거? 좋은 대학에 안 가면 그럼 실패한 인생인가? 그럼 세상은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과 절대다수의 실패한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는 소리? 그러면서 왜 모든 목숨은 소중하대? 실패감을 맛보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나? 다들 변태야? 그런데 성공과 행복은 다른 거라고? 나는 성공과 행복을 꼭 양자택일 해야 한다면 행복을 택할 건데? 그게 아니라 성공하면 행복해질 확률이 높아진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아까 내가 한 얘기 안 들었나? 어른이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지?
물론 마음속으로 혼자 한 생각들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가족이고 친구고 선생님이고 아무에게도 꺼내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종교에 의지하면 답이 보인다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우주 전체로 보면 고작 모래 한 알 만한 지구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누군가는 굶어 죽고 있는데 신은 그 모든 참상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마음의 평화를 찾아준다고는 하는데 상황을 반전시켜주거나 물리적으로 직접적 도움을 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의지를 하기엔 나는 자아가 강한 편이었고 멘털도 꽤나 튼튼했다. 무엇보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만 좋아해 상대는 피를 보아도 괜찮다는 입장의 신이라면 나와는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물리적으로 입증 불가하면 절대 존재하지 않아! 라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믿음에 관한 입장은 이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린 나이부터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은 답도 없으면서 머리만 아프게 만들었기에, 다급히 머리를 흔들며 공부를 시작하거나 차라리 꾸벅꾸벅 조는 편을 택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기엔 세상은 너무 빠르고 복잡했고, 내가 해야 할 공부는 한 가득이었으며, 당장 올려야 할 성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같았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다니고 또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이따금 나는 누구지? 라는 생각을 했다. 분명 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은 맞는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은 내게 파워 외향적인 사람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복작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난 혼자만의 동굴을 찾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실수를 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누군가와 원치 않게 이별하는 상황이 되면 속상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친한 사람들을 찾아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타인은 절대 남의 불행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엔 또다시 홀로 남아 온통 뒤엉켜버린 생각과 감정들을 다스려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작은 '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 업무적 실수를 하는 띨빡한 인애와, 사려 깊지 못하게 말을 내뱉고 수습하지 못하는 멍청한 인애와, 그런 인애를 매섭게 다그치는 지는 뭐 잘났나 싶은 인애와, 너덜너덜해진 인애가 더 울지 않도록 꼭 안아주는 따뜻한 버전의 인애와, 예쁘게 떠오른 태양과 말간 바람을 만날 때면 물 만난 레트리버처럼 행복해하는 인애와, 그래도 제 전공 개 못 준다고 본능적으로 계산에 빠삭한 인애와, 손익계산을 마쳐 놓고도 손해를 보는 결정을 종종 하는 바보 같은 인애와, 그런 인애를 걱정하며 막연한 미래를 생각하는 현학적인 인애와, 이 모든 자아들을 가슴 아래 깊은 곳에서 묵직하고 단단하게 모두 컨트롤하고 있는 본질적인 인애.
이토록이나 많은 인애들이 내 안에는 함께 살고 있었다. 물론 TPO에 맞는 인애들이 수시로 바뀌어 튀어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면(학생 때는 이걸 가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모습들도 모두 다 '나'였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단단하고 깊고 큰 진짜 '내'가 상황에 따라 튀어나오는 '나'들을 웅숭깊게 제어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그럼에도 세상을 산다는 건 녹록하지만은 않은 일이어서 가끔은 모두가 다 싫고, 정말 다 망한 것 같고, 이미 혼자 있지만 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휴대폰도 노트북도 다 놓고 포르투갈 어느 시골마을쯤으로 훌쩍 떠나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시간이다. 하지만 아무리 추진력 갑 오브 갑인 나도 그건 좀, 이라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실종신고 급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포르투갈엔 가 본 적이 없다.)
한동안 끙끙 앓던 나는 결국 고민 끝에 내 안에 나만의 절벽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절벽의 윗부분에 애매하게 파인 작은 공간이 있는데, 혼자 있고 싶을 때면 그 절벽으로 날아가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는다. 처음엔 그저 높은 절벽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장면의 전부였는데, 이제는 나름 절벽 안에 동굴도 생기고 길도 생겼다. 절벽 위로는 아직 올라가 보지 않았다.
그러다 몇 달 전, 내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아무도 없는 절벽은 너무 외롭고 고립된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셜록(베니 ver.)에 나오는 마음속 궁전의 초 단순화 버전 같았다. 시즌3에 나오는 찰스 오거스터스 마그누센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셜록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나은데. 팬이지만 비슷한 사람이고는 싶지 않아 나만의 행성과 자아를 투영할 새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목성을 걷는 펭귄.
지구형 행성을 택하면 한 발을 떼는 걸음걸음이 너무 현실감 날 것 같아 택하지 않았고, 목성형 행성 중엔 목성이 지구에서 가장 가까워 목성을 선택했다. 그래도 목성 정도면 내가 사랑하는 지구가 보일 테니까. 충분히 크고 동글동글한 행성이 색도 아이스크림처럼 맛있어 보이고 심지어는 예쁘기까지. 물론 그 아름다움이 지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덜 황량한 느낌이어서 좋았다. 내 자아의 새로운 휴식공간, 목성. 우울하거나 생각할 공간이 필요할 때면 그 목성을 혼자 자박자박 걸음을 걷는 펭귄.
상처받으면서도 사람을 좋아한다. 개도 아니면서.
어린아이도 아닌데 궁금한 게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여기저기 마음과 사랑을 나누어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고, 받을 준비도 되어 있고.
이것저것 모두 잘 해내고 싶지만 능력 부족으로 사실은 실수투성이 엉망진창인.
이게 평범한 거야, 평범한 게 행복한 거라고! 라고 생각하면서도 왜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를 더 갈망하는.
열정이 넘치네! 기특해! 라고 믿고 싶지만 그 열정 때문에 자주 좌절을 맛보아야 하는.
욕을 먹거나 비난을 받거나 (자의든 타의든) 따돌려지거나 어찌 되었든 혼자이고 싶을 때
작은 펭귄이 되어 내가 택한 서브 행성인 목성으로 날아가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또 한 명의 나. (이러면 다 끝나버려도 좋겠다 싶은 순간도 별 것 아닐 때가 많다.)
결과적으론 앞으로 이 브런치 매거진에 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건데, 너무 거창해져 버렸습니다.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이든 뜬구름 잡는 세상의 이야기이든, 생각이 예쁘게 정리되면 꼭 함께 나눌게요.
여기는 목성. 저는 목성을 걷는 펭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