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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애 May 08. 2022

'장래희망'이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직업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사이에서. 열아홉의 우리들에게.

 고등학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학에 다니던 20대 초중반, 글을 쓰며 먹고살겠다고 결심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글쓰기 플랫폼이라도 많아졌지, 막 페이스북이 떠오르던 그 시절엔 변변한 글쓰기 플랫폼도 하나 없어 열심히 쓴 소설을 일일이 제본을 떠 출판사들에 투고를 해야 했습니다. 다양한 공모전들에 응모를 했지만 번번이 낙방을 했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항상 장편소설이었기에 일 년에 두 편을 쓰면 정말 사력을 다한 해였습니다. 그렇게 두 개의 공모전에서 낙방을 하면 그 해에 글쓰기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0원이었어요. 아무리 패기에 넘치는 20대라지만 결코 쉽지 않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글로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은 경제적 압박에 더해 정서적, 관계적 압박을 끌고 왔습니다. 소위 친하다는 사람들 중엔 종종 무례한 사람들이 있었고, 몇몇은 '돈을 못 벌면 그게 취미지 어떻게 직업이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뇌까렸습니다. 그런 말들을 듣다 보면 정말 궁금해서 혹은 아무 생각 없이 '글 쓴다면서 책은 언제 나오냐'라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까지도 곡해되어 들렸습니다. 별것 아닌 말들은 대못이 되어 가슴에 박혔고, 상을 타거나 책을 출판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초함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대학 졸업반 때 몇몇 국문과 교수님들께서 찍어주셨던, 등단하고 싶으면 어느 어느 대학 문창과나 국문과에 입학하라는 좌표를 찾아 정말 재입학했어야 했나 하는 절망감도 들었고요. (저는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특정 대학을 가지 않아도 글은 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글쓰기의 기본적인 당위성에 관한 물음과, 꼭 국문과를 다시 가지 않더라도 괜찮다며 응원해주신 몇몇의 소수정예 독자님들께서 저를 대학이 아닌 노트북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덕분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써야겠다.'라는 생각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어린 저를 응원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머릿속에 떠오로는 다양한 아이디어들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창작욕구에 하루하루가 찬란해야 할 시기였지만 소설가로 먹고살겠다는 제 상황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앞에서도 언급했듯 소설로 인해 파생되는 경제적 수익이 전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먹고는 살아야겠고, 무엇보다 부모님께는 계속 예쁘고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어도 사랑을 듬뿍 주실 부모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할 수 있는 기특한 딸이고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안 그래도 되는 일이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나이가 더 든 지금도 그러한 압박감을 약간은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 참 쉽게 바뀌지를 않네요.


 그 때문에 스무 살 때부터 발을 담고 있던 사교육 업계를 대학 졸업 후에도 빠져나오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입시 현장의 한가운데 서서 고등학생들과 함께 으쌰 으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가르쳐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최근 10년은 항상 고3들을 끼고 수업을 했고, 최근에는 고3만 집중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 다들 국어를 가르치겠구나 하시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고요. 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저도 조금 신기하기는 합니다.


 아이들과 수시 및 정시 상담을 하다 보면 정말 많은 아이들이 눈물을 터뜨립니다. 여학생, 남학생 가릴 것 없고요. 성적이 좋든 안 좋든 그것 역시 큰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성적이 좋지 못한 학생들이 더 많이 울기는 합니다. 부모님과 친구들은 '성적이 잘 안 나와도 그저 착하고 밝은 아이'로 생각하는 친구들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립니다. 성적표를 앞에 두고 한 힘들지, 괜찮아? 한 마디에 한 시간씩 우는 아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럴 때면 저도 함께 울고 싶은데 저까지 울어버리면 상황을 수습할 수 없어 그저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고 상담을 시작합니다. 어찌 되었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보기는 해야 하니까요.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열일곱 살, 만으로는 고작 열다섯, 열여섯에 불과한 친구들은 성적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제법 기세가 등등합니다. 중학생 때는 80점대, 90점대도 곧잘 받았고, 공부를 안 하다가도 내신 대비 바짝 하면 성적을 잘 받기도 했었으니까요.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는 상대평가 방식을 대부분의 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고 싶은 대학을 물어보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이야기합니다. 아주아주 많이 내려가면 중앙대나 경희대 선의 대학들을 언급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이 대학들이 성적순으로 반을 편성하는 고등 학원에서 가장 마지막 반에 있는 친구들이 희망하는 대학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꽤 하는 친구들이든 아닌 친구들이든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학과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이건 현 입시 시스템 하에서는 굉장히 불리한 스탠스입니다. 학생부 종합으로 수시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1학년 때부터 한 방향으로의 생기부가 빌드업되어 있는 것이 유리한데,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면 가고 싶은 학과를 잘 결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생기부를 채워 넣을 시간이 촉박해져 내용이 부실해지기 때문입니다.


 현 수시 시스템은 학생부 교과 / 학생부 종합 / 논술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학생부 교과로 앞서 언급한 대학들을 가려면 기본 1등급대의 성적을 탑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대충 전교권 학생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고에서는 반에서 1등을 하더라도 위에 언급한 대학들을 가지 못하는 경우도 수두룩합니다. 아직 고3이 되지 않은 학생들이나 학부모님들께서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 아이가 반에서 5등 정도 해요.'라는 건 중앙대나 경희대엔 학생부 교과로 지원해 합격할 확률이 0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고등학생들이 좋아하는 대학들이라 중앙대와 경희대를 예시로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생부 종합으로 대학에 진학하려 계획을 세웁니다. 내신도 열심히 준비하고, 온갖 교내 대회에도 나가고, 수행평가도 꼼꼼히 준비합니다. 독서도 하고, 세특이라 불리는 세부특기사항도 열심히 준비해 갑니다. (특목고나 자사고가 아닌 학교들에선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세특에 들어갈 내용을 직접 써오라고들 많이 요청하십니다. 물론 원칙은 이러면 안 되겠지만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입니다. 생기부가 아무리 빵빵해도 성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학생부 종합에서도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농후합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알지 못하고 가고 싶은 학과를 정확히 모르니 매사 열심히는 하는데 학생부 내용이 중구난방입니다. 물론 가고 싶은 학과를 똑 부러지게 정해놓은 학생들도 있습니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주로 그러한데, 특히 의대에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생기부 관리를 기가 막히게 잘 해냅니다. 업체라 일컬어지는 생기부 학원들의 도움도 종종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학생들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저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할당량만을 어찌어찌 해냅니다. 최선을 다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공부를 했다고 하기에는 양심에 찔리는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고2 때까지도 자신의 성적과 희망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성적 사이의 간극을 인지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3이 되며 극도의 불안감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하기 시작하면 성적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공부를 해도 딱히 만족할만한 성적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당황하고 초조해합니다. 우울감은 깊어가고, 부담감에 짓눌려 낯빛들은 하나같이 누가 봐도 고3처럼 변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엔 구구단만 외워도 부모님께 칭찬을 받다가 정원이 정해져 있는 대학에 들어가려 하니 자유롭게 살다 갑자기 뜬장에 갇힌 강아지들처럼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학원이나 독서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어났는데 실제 공부를 하는 시간은 고1이나 고2 때보다도 적은 경우가 한 트럭입니다. 남 탓을 하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부모나 세상 탓을 하는 친구들도 늘어납니다.


 그런 친구들과 여름이 되면 수시 원서접수를 위한 실질적 면담을 시작합니다. 가고 싶은 대학을 갈 수 있는 친구들은 너무 소수이기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한바탕 울고 실제 원서를 넣을 대학과 학과를 결정합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친구들이 장래희망을 말하지 못합니다. 재미있어하는 일, 흥미로울 법한 일들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친구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고 위로합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때 딱히 간절한 장래희망이 없었기에 제가 무어라 조언을 할 처지도 못 됩니다. 그저, 그럼에도 원서는 넣어야 하니 대충이라도 학과를 간추려보자고 읍소합니다.


 가고 싶은 학과를 정한 친구들도 장래희망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정 학과를 명확하게 가고 싶어 하는 똑 부러지는 친구들 역시 희망하는 대학과 가고 싶은 학과가 있을 뿐, 그 학과를 나와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직렬도 업무도 성격 적합도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꿈인 대학생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무원이나 교사 역시 인기가 많은 직업들이었지만 요즘은 시들해졌습니다. 하긴, 인기 직업이야 돌고 도니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시스템 자체가 꽤나 조급하고 조금은 잔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저 역시 글을 쓰고 먹고살겠다는 생각을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했는데, 그래서 국문과나 문창과와는 전혀 관계없는 학과를 졸업하고 학위를 받았는데, 아이들에게는 장래희망을 이야기하고 그에 맞게 생기부를 빌드업해보자고 말을 하는 것이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솔직히 미안하기도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진지한 장래희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적이 있는 것일까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닌, 그 이후의 삶을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10대 청소년들에게 줄 생각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요.




 그래서 장래희망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 아이들이 꿈꾸는 직업은 부모의 바람이 투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부모님께서 은연중에 심어주신 '이런 직업이 좋겠다.'라는 직업이 학교에 적어 제출하는 제 장래 희망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격려와 응원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당연히 아닙니다. 그 나이 때는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적어내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 나이에 장래희망을 적어 내라고 하는 것은 시야의 폭을 좁게 만들고 직업에 대한 생각을 '일단 아무 거나 적어서 내지.' 정도의 가벼움으로 치부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고등학생이 되어서 진짜 학과를 골라야 할 때 아이들이 당황해서 무력감에 빠지지요. 더 이상은 대충 아무 거나 써서 낼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은 대학 서열에 목을 맵니다. 대학을 서열화해서 나열하고(저희 때도 그랬는데 아직도 그럽니다. 아니, 더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고작 열아홉, 스물인 친구들이 스스로 인생 실패자라고 느끼는 시간을 보냅니다. 물론 주변에 건강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많아 그 시간을 잘 버티고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30대, 40대, 50대, 60대 그 이상의 나이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잖아요. 대학은 정말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요. 물론 좋은 학벌이 편할 때는 많지만 사실 학벌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 리스트에는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생기부를 적을 때도 장래희망 란이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공부에 흥미가 있고, 그래서 어떤 학과를 진학하고 싶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요. 학종도 성적이 낮으면 어차피 떨어지는 시스템이고요. 대신 다양한 학과들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 또는 해당 학과를 졸업하면 어떤 직업들을 가질 수 있는지, 그런 내용들을 수업시간에 함께 공부하고 그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를 생기부에 포함시키면 이 지긋지긋한 학벌과 서열 시스템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되면 각 대학에서 강점을 갖고 있는 학과를 부각시켜 서열 의존도를 낮출 수 있게 될 테고, 아이들도 어떤 학과에 진학해야 자신의 미래 취업에 도움이 되는지 정보를 얻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장래희망은 직업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가의 철학의 영역으로 넘겨주면 좋겠습니다. 몇 등을 못 해서 속상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패배자가 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수, 삼수, 사수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대학에 들어가고도 자신은 실패자라고 생각을 하는 수많은 아이들을 꼭 안아주고 싶은 오늘입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진학하기를 원했던 대학 입학에 실패한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자격지심으로 힘들어했던 스무 살의 제게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고 싶은 밤입니다. 수고했다고. 최선을 다한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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