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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애 May 15. 2022

아무 일도 없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

알다가도 모를 나의 마음에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분명 그제까지만 해도 열정이 넘쳤었다.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5월의 이런저런 플랜들을 점검하고, 하고 싶은 일들에 체계적으로 우선순위를 매겨 실행에 옮겼다. 야구장엔 며칠 며칠에 가고, 발레학원엔 언제 언제 가고, 지인들과의 약속은 어떻게 조정하고, 가장 중요한 글쓰기는 언제까지 퇴고하고 또 언제까지는 새로 쓰고. 브런치 매거진 표지를 직접 내 손으로 그리겠다며 이번 달엔 미술학원도 등록했다. 당연히 돈 버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든 일들이 재미있었고, 해가 길어져 신난다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분명 그랬었는데 바로 어제,


 그 열정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보통은 스스로 쓴 소설을 읽으며 '대박 재밌잖아? 이런데 왜 아직 출판이 안 되었지? 나중에 꼭 출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를 해야겠어!'라는 생각을 하는데, 어제는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을 쓰고 책을 내달라고 하려고 했다는 말이지? 미쳤네. 양심 좀.'이라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퇴고를 하던 펜을 손에서 놓고 말았다. 수습을 해볼까? 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큰 줄거리만 빼고는 다 뜯어고쳐야 할 것 같았다. 감히 손도 댈 수 없는 그 거대한 작업은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고, 결국 블랙홀 같은 무력감이 온몸을 뒤덮어버렸다.


 딱히 심경에 변화를 줄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평소엔 내가 썼지만 정말 기가 맥히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소설이, 그저 갑자기 퇴고를 위해 손도 대기 어려울 정도의 형편없는 글로 보였을 뿐이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소설을 오래도록 쓰는 것이 꿈인데, 그 꿈 자체가 신기루처럼 부서져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다 포기하고 싶어졌고, 인생 따위 앞으로 어떻게 되어도 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도 꽤나 진지하게.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의 나는 이런 모습의 나에게 많이는 당황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며 여유가 생겼다. 나이가 든다는 일이 이렇게 든든한 일일 줄이야.


 감정의 단계를 0에서 10으로 보았을 때, 20대 초반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1~2단계에서 8~9단계의 감정 사이를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우울해서 힘든 것이 아닌,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의 진폭이 너무 커서 매일매일이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랬다. 어떤 날은 기분이 너무 좋아 학교 옆 창경궁 앞으로 달려가 꼬맹이들 뒤에 줄을 서서 솜사탕을 사 먹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 친구를 꼬드겨 학교 밖에 있는 스타벅스까지 나가서 핫초코를 사 마셨다. 길을 걷다 몇 번이나 미끄러질 정도로 함박눈이 펑펑 내렸던 날이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이 넘쳐 시험기간에도 낮에는 시험을 보고 밤에는 야구장으로 향했다. 원정 날에는 내가 선수도 아니면서 부산에도 대구에도 ktx를 타고 갔다. 바람이 맑아서 기분이 좋아졌고, 이유가 없어도 기분은 시도 때도 없이 좋아졌다. 그리고는 나빠졌다.


 고등학생 때는 워낙 기계 같이 공부만 해서 감정을 잘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 고삐가 풀린 20대가 되며 감수성이 대폭발 했다. 슬픈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백조의 호수 발레 동영상을 보다 백조에 감정이입을 하는 바람에 지하철에서 끅끅대며 운 적도 있다. 열 명, 스무 명 즐겁게 모여 이것이! 바로! 한반도의! 20대이다! 싶게 놀다가도 갑자기 세상에 혼자 남은 것처럼 외로워졌다. 분명 방금 전까진 아드레날린이 대폭발한 것 같았었는데, 지구에 혜성이라도 부딪혀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그러다 그냥 이대로 소멸해버려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차오르는 흥을 주체 못 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다시 신이 나고, 행복해졌다.


 극심한 감정 기복에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 야, 네 호르몬엔 아무 문제없어. 사람들은 원래 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해. 유난 떨지 마.


 대충 이런 대답들이 돌아왔다. 진지하게 상담을 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정신과 심리검사가 재미있어 보이긴 하지만 그 돈 아깝지 않아? 하는 답변들만 돌아왔다. 그래서 그냥 버텼다. 울고 웃으며 하루를 견뎠다. 살아보니 그냥 살아졌다. 막 산 것도 아니고, 나중에 그 시절을 돌아보았을 때 스스로 꽤 만족할 정도로 기특하게 살아냈다.


 감정의 업 앤 다운이 극에 달했던 20대를 꿋꿋하게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글이었다. 창작을 업으로 삼고 살겠다 결심한 사람이었기에, 내게는 복잡한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낼 수 있는 매개가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이가 들수록 덤덤해졌고, 조금은 현명해졌다.(과연?) 정말 호르몬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감정의 기복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스스로 '이것이 조증인가.' 싶은 기분 좋은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고,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화가 나는 날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풀어낼 방법과 마음을 다스릴 방법을 어느 정도 찾아내서인 것 같다. 물론 선인들처럼 득도를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른을 훌쩍 넘게 살았는데 아직도 불완전하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너무 젊고,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슬픔과 좌절도 한 트럭일 테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불같이 화를 내는 날도, 극심한 허무에 빠져 마지막이 두렵지 않은 날도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은 또다시 나만의 절벽으로 달려가, 혹은 펭귄으로 화한 내가 살고 있는 목성으로 날아가 공기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크게 숨을 내쉰 후 몸을 뉘어야겠다. 굳이 스칼렛을 찾아갈 것도 없다.


 우리 모두의 우주는 원래 불완전하니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뭐.


 



 감히 제가 마음을 다스렸는 방법 중 하나를 말씀드리면, 너무 힘들고 화가 나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날엔 일기를 써보세요. 내 안에 숨어 있던 또 다른 '나'들이 모두 함께 읽는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들을 주절주절 쓰기 시작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가끔은 문제의 해결방안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모든 분들이 밤에 편안하게 단잠 주무실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인생을 '왜' 살고 있지를 생각하고, 제가 삶을 대하는 가치관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인데요. 이건 기분이 정말 똥 같을 때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가 회복하는 과정이 되어서야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다시 잔잔한 호수로 만드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어요.


 오늘 여러분의 평상심은 어떠한가요? 모두 잘 지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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