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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ant Pin Oct 14. 2020

내 쓰레기 좀 대신 버려줄래?

- 엄마, 이렇게 묻는 친구랑 계속 놀아도 돼요?

유치원에서 돌아온 우리 아이는 늘 땀에 절어 있다.

허리춤까지 길게 내려온 머리를 눈이 찢어질 듯 세게 잡아 올려 양갈래로 틀어 묶어도 전혀 소용이 없다. 

옆머리는 양 볼 언저리에 늘 찰싹 달라붙어 있고 상기된 얼굴은 마치 잘 익은 토마토마냥 달아올라 있다.


"오늘도 열심히 뛰어놀았구나? 유치원이 그렇게 재미있니?"

아이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한다.

"당연하지.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잖아! 같이 종이접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정말 재밌어."

"아~ 유나 말하는 거지? 가장 친한 친구 말이야."

"응~ 유나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야. 같이 놀면 정말 재밌어. 오늘도 같이 스티커 판매 놀이도 했는걸."

"와~ 재미있었겠다. 유나가 오늘은 어떤 스티커를 가져왔으려나?"

"응~ 몰랑이랑 디즈니 공주 스티커를 엄청 많이 가져왔지 뭐야~ 정말 너무 예뻤어."

평소와는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아이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고 늘 그랬듯이 목소리도 고조되어있었다. 

'오늘도 즐겁게 잘 보냈구나.' 하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때 아이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엄마~ 유나가 갖고 있던 스티커 중에 내가 갖고 싶었던 것도 있었거든."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바로 아이에게 되물었다.

"너 혹시 유나에게 허락 안 받고 스티커를 집으로 가져온 건 아니겠지?"

"응~ 아니야. 유나가 줬어. 내가 유나 쓰레기를 버려줬거든."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한 5초 정도 멍해진 나의 표정을 보고 아이가 살짝 당황하며 속사포 같이 말을 쏟아낸다.

"유나가 스티커 판매하다가 바빠서 쓰고 난 휴지 쓰레기를 버리러 갈 시간이 없었나 봐. 갑자기 나한테 이 쓰레기를 버려주면 내가 갖고 싶은 스티커를 준다고 해서 내가 버려줬지. 그런데 엄마 기분이 안 좋아? 왜 갑자기 말을 안 해?"



솔직히 유나는 참 착하고 밝은 아이였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의심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봤지만 아이의 일에 만큼은 평정심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이와 대화를 이어간다.

"재인아, 유나가 쓰레기 버려달라고 했을 때 너의 기분은 어땠니?"

"음.. 난 내가 갖고 싶은 스티커를 준다니까 좋긴 했는데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는 또 기분이 썩 좋진 않았어."

아.. 아이도 뭔가 잘못된 상황이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엄마는 유나가 참 좋아. 재인이와 가장 친한 친구니까. 그런데 오늘 유나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네. 유나가 쓰레기를 버리러 갈 상황이 되지 않아서 재인이한테 부탁했고, 재인이가 돕고 싶어서 대신 버려준 것이라면 괜찮아. 그런데 만약 쓰레기를 버려주는 대가로 스티커를 준다고 말했다면 엄마가 생각했을 때 유나의 행동은 좋은 행동은 아닌 것 같아."

아이도 자신이 어렴풋이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의 해답을 마치 찾은 듯 풀이 죽어 나에게 이야기한다.

"그럼 앞으로 유나랑 놀면 안 되는 거야? 난 유나가 좋은데.."

"아니~ 당연히 놀아도 되지. 그런데 재인아 엄마는 오늘 유나가 한 행동이 유나가 알고 한 건지 모르고 한 건지 알아보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응. 내일 가서 내가 물어보면 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단.. 미션 한 번만 수행해 보자."

"어떤 미션?"

그게 말이야.. 뭐냐면..


나는 아이에게 내일 유치원에 가서 유나가 그랬던 것처럼 유나에게 똑같은 부탁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평소 유나가 갖고 싶어 했던 스티커를 두고 나를 한 번만 도와주면 스티커를 주겠노라고.. 대신 도움을 청하는 방식은 아이가 직접 고르기로 했다.

나는 속으로 제발 유나가 해맑게 우리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기를 기도했다.

아직 7세인 우리 아이들이 이미 자본주의적 권력의 맛을 알아버렸다고 믿는 것보다는 아직은 좋아하는 스티커를 위해 친구의 엉뚱한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 편이 훨씬 상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아이가 하원 하여 돌아오기를 그 어느 때 보다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혹여나 상처 받았을 아이를 위해 평소보다 더 환하게 맞아주리라 다짐하며 마음속에 되뇌고 있었다.

드디어 아이가 탄 셔틀이 도착하고 나는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이는 어제보다 더욱 상기된 표정으로 셔틀버스에서 뛰어내리며 나에게 달려왔다. 예감이 나쁘지 않았다.

"엄마!! 나 미션 성공했어!! 유나가 내 부탁 들어줘서 스티커 줬어!!"

나는 마치 미션 즈음 벌써 잊고 있었다는 듯이 침착한 척 애쓰며 질문했다.

"아~ 그랬구나. 어떤 부탁을 했는데?"

"응. 내가 정수기에서 물 받는데 잠깐만 대신 물병을 잡아 줄 수 있냐고 했지. 그러면 스티커 줄 수 있다고. 그랬더니 유나가 너무 좋다면서 물병 들어줬어."

"유나가 재인이를 잘 도와줬구나. 참 고맙네."

"응. 난 유나가 너무 좋아."


잠시나마 유나를 의심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었다. 하루 동안이었지만 참으로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안팎으로 흉흉한 뉴스들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지.. 아니면 아이 일에는 민감하고 날이 선 내 마음 때문인 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설사 유나가 우리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이에게 차마 '유나랑 놀지 마'라는 말은 끝끝내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쓰레기 셔틀보다도 친한 친구를 잃는 게 지금 아이에게는 가장 슬픈 일이라는 것쯤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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