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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공원 Dec 30. 2020

낯선 도시에 정착하는 법

:: 넷플릭스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았다 


  지난 3월 14일, 내가 사는 도시 바르셀로나에도 봉쇄령이 내려졌다. 관광객들로 늘 북적이던 거리는 텅 비었고, 이동제한령이 내려진 도시에서 명분 없는 외출은 불가능했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차치하더라도, 코로나 19로 봉쇄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운 좋게도 재택근무. 매일 집밥을 해서 먹는 것. 묵혀두었던 책을 꺼내 읽거나, 남들 다 하는 달고나 커피도 만들어 먹었다. 거의 유일한 외출은 2-3일에 한 번 식료품을 사러 동네 마트에 가거나,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일. 개인형에 목줄을 채우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영상이 sns를 타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스페인 봉쇄령 당시, 반려동물과의 외출이 허용되자, 어항을 들거나, 닭에 목줄을 하고 외출한 사람들. 벌금형이 내려졌다. 자료출처 : 스페인 경찰청


  넷플릭스에서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작들이 서비스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바이러스의 공포도 잠시 잊고 행복했다.  나의 반짝이던 유년시절과 빛나는 청춘을 함께 했던 작품들을 넷플릭스로 볼 수 있다니!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여러 번 봐도 질리지 않는 유명 작품들도 반가웠지만,  한 번 보고 추억 속에 묻어두었거나, 이미 수십 년 전 작품이라 미처 보지 못했던 익숙한 이름의 작품들도 몇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1989년작 <마녀 배달부 키키>다. 



고고 키키! 날아라 키키! 


  바람이 부는 언덕에 누워 몰래 들고 나온 아빠의 라디오를 듣고 있는 키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키키는 집으로 돌아와 검은 고양이 지지에게 말한다. 


  “지지, 오늘 밤 출발할 거야” 


  마녀 세계에는 오래된 관습이 있었다. 마녀가 되기 위해선 열세 살에 집을 나와 낯선 동네에서 1년을 홀로 살아야 했다. 이른바 마녀 수행. 보름달이 뜬 밤,  열세 살이 된 키키는 마녀 수련을 위해 집을 떠나기로 다짐하고,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린다. 마녀 수행의 기본 조건은 우중충한 검은 드레스에, 머리엔 빨간 리본을 하고, 늘 검은 고양이와 동행할 것. 촌스럽다며 입이 삐죽 나온 딸 키키에게 엄마는 말한다. 


 “키키, 너무 겉모습에만 신경 쓰지 마.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야”  


  엄마는 키키가 생고생해서 만든 작은 빗자루 대신 엄마의 튼튼한 빗자루를 딸의 손에 쥐어준다. 부모의 담백한 응원과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수행 길에 오르는 키키. 바다가 보이는 남쪽으로 힘차게 날아간다. 자립의 설렘도 잠시, 시계탑이 근사한 항구도시에 도착해 묵을 곳을 찾아보지만, 작은 방 하나 구하는 것도 영 쉽지 않다. 도시 사람들의 냉대와 무관심에 키키는 자꾸만 주눅이 들고,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슬럼프를 겪기도 하지만, 그녀의 재능을 알아봐 주는 따뜻한 이웃들을 만나면서 키키는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낯선 도시에 정착하기 


  마녀 수행을 앞두고 들뜬 키키에게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대로 안 되거든 언제든 돌아오너라." 


  서른이 넘어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나는 열세 살 키키보다 더 겁이 많은 어른이었다. 도착한 지 3주 만에 새로운 도시에 대한 '설렘'은 '답답함'과 '불편함'으로 변했고,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이 곳에서 나는 점점 표정을 잃고 뾰족해졌다. 동네 마트에 갈 때조차 괜한 긴장을 했다. 탄산수 말고 그냥 생수를 먹고 싶었을 뿐인데, 카탈루냐어를 쓰는 직원 앞에서 나는 진땀을 뺐다. 한국에서 초중고대학교를 무난히 졸업하고,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왔던 나는 바르셀로나에 오자마자, 말 못 하는 미취학 아동만도 못한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호기롭게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올랐던 과거의 내가 무색하게도, 낯선 도시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주 아주 더디게.  


  먼지가 풀풀 날리는 다락방 침대에 누워  아빠의 라디오를 들으며 홀로 잠을 청하는 키키를 보면서, 호의를 베푸는 남자아이 톰보에게조차 날이 선 모습으로 경계하는 키키의 모습에서, 배달부 일을 마치고 비에 흠뻑 젖어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뒷모습에서  그 시절의 나를 보았다. 감기에 걸려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때에도, 비비드 톤의 화려한 옷을 입고 깔깔거리는 여자 아이들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키키의 얼굴 위에도 나의 그 시절이 오버랩되었다. 


  "일단 가보고, 못 살겠으면 그냥 와. 여기가 네 집이잖아." 


  떠나올 때 누군가 내게 해 준 말이다.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고만 하면, 버선발로 공항까지 나와 반겨줄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이 곳에서 나는 조금 더 있어보기로 했다. 퇴근을 한시간여 앞둔 오후 5시, 구엘 공원 Park Guell 벤치에 앉아있으면 내 어깨 위로 가만히 내려앉는  햇살이 그 시절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끔뻑 졸다가 고개를 들면, 멀리 바다가 보였다. 

오후 5시, 구엘공원에 앉아있으면 보이는 풍경. 멀리 바다가 보인다. (2018)


그리고, 살아가기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곳을 사람들은 '집'이라고 부른다. 낯선 도시에 내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집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단순 여행이 아닌, 정착의 과정이 시작된다. 여기저기 부딪치며 요란하게 날던 키키는 낯선 동네에서 좋은 이웃들을 만나고, 집을 얻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적응해가지만, 동시에 새로운 난관에 부딪히기도 한다. 키키가 슬럼프에 빠져 날지 못할 때에도 까만 고양이 지지는 늘 키키의 곁을 지켜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키키에게도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고, 이웃집 흰고양이와 친구가 된 지지는 인간의 말을 잃는다. 지지가 인간의 말을 잃어버린 것일까, 키키가 고양이의 말을 더 이상 알아듣지 못하게 된 것일까. 그저 시간이 조금 흘렀고, 그 시간만큼 키키가 자랐을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살아남는 법 


  바르셀로나에 정착한 지 6년쯤 흘렀다. 생수 한 병 사는 것도 낯설었던 이 곳에서 나는 세 번의 이사를 했고, 나의 베프 강아지 마르고를 만났다. 뒤늦게 가정도 꾸렸다. 낯선 도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익숙하지 않은 것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넘어졌을 때, 가뿐하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 말하자면 회복탄력성이다. 운 좋게도 그 용기를 응원해줄 톰보나 오소노 아주머니 같은 인연이 나에게도 찾아온다면, 정착 속도는 훨씬 빨라지겠지. 운이 좋게도 나는, 그런 인연들을 만났다. 6년째 적응 중이지만, 여전히 낯선 도시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좋은 인연들이 조금 늦게 찾아온다고 우울해하거나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예상치 못한 친절과 호의는 늘 어디선가 다가오는 법이니까. 


  "우울할 때도 가끔 있지만 저는 이 마을이 좋답니다." 

 

  키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문장처럼,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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