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종착역은 장례식장인걸.
감정이란 어렵고 날것 그대로라 절제하고 살아왔다. 나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 일본에 10년간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몸에 베인 듯했다. 일본사람들은 앞에서 얘기를 잘 못하고 뒤에서 뒷담을 깐다 라는 이야기가 많은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느샌가 내가 그러고 있었다. 이상하게 언제부터인가 감정이 상해도, 나의 생각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 며칠 동안 이것들을 어떻게 조리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공항에 가는 길엔 눈물이 났지만, 가족들 앞에선 슬프지 않았다. 나는 친딸처럼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왔지만, 손녀딸이기 때문에 한발 뒤로, 감정을 눌러 담은 것도 있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있었다기보다는 사실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다.
가족들 중 나를 질투하는 가족들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첫째 손녀딸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부모님과의 추억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대부분이었다. 가족 중 한 분이 대놓고 슬퍼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할아버지는 너를 제일 이뻐하셨으니, 네가 제일 슬퍼해야지 “라고 하셨다.
슬픔에 크기가 있을까. 그걸 표현한다고 해서 슬픔이 배가 돼서 후련함으로 돌아올까. 슬픔을 강요받는 느낌이라 더욱 눈물이 나지 않았고, 기분이 안 좋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요” 로 대답을 일괄했다.
어느 누가 내게 “이제 일본에 오래 살았으니 일본사람이네”라고 했다. 속으로는 무슨 의도로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고, 그렇다고 썩 좋은 기분도 아니었다. “일본에 오래 살았다고 일본인이 된 건 아니에요”라고 용기 내어 말했다. 사실 이렇게 받아치는 말을 하는데도 할까 말까 엄청 고민하고, 두근거리면서 말했다. 속으로는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그런 의도가 아닐 수도 있는데’ ‘이 말을 해서 상대방이 기분이 안 좋아지면 어떡하지’라는 복합적인 생각들이 대답하는 데까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실 그렇게 기분이 나쁘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묻는 이가 한국인으로서 어떤 의도로 ’ 일본사람이네 ‘라고 말하고, 나의 반응을 살피는 건지 궁금했다.
30살 인생, 나에게 장례식장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태어나, 흙이 될 때까지의 인생의 종착점이 이곳이라도 해도 될런지. 종교가 없는 사람으로서, 태어남과 동시에 칙칙폭폭 달리는 인생의 선로 안에 어떤 일이 있던, 종착역은 곧 이곳이 될 거라는 것을.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는 내 인생을 못 살아갈 줄 알았다. 너무너무 슬플 줄 알았다. 적어도 초등학생 때는 제일 무서운 악몽이 내가 죽는 꿈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꿈이었다.
그래도, 오랜 시간 암투병을 해오시면서 인생의 종착점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다. 남성의 평균삶의 나이는 83세라고 한다. 향연 83세의 나이로, 인간에게 주어진 선로의 길이를 딱 맞춰 채워 돌아가신 할아버지.
모두에게 삶의 길이는 다양하겠지만, 큰 사고로, 혹은 예상치 못하게 돌아가시는 것이 아닌, 노환으로 83년이라는 삶을 가득 채우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삶이 아주 멋지고 부럽다고 생각한다. 나도 금세 나의 삶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됐고, 가끔 돌이켜 추억하는 할아버지가 이제는 내 마음의 곁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은 내가 느끼고, 표현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 일본과 한국의 표현의 방법과 차이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날것을 어떻게 반죽하고 조리해서 몸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표현을 할 것인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번을 계기로, 감정이라는 것에 아주 오랜만에 직면을 해보며, 다시 한번 조리법을 연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인터뷰했던 내용들을 아래 영상에 남겨놨어요:)
https://youtu.be/4VBPSuWT0xc?si=0BTz_nhHR0Ew3Vy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