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둘 남매 하나, 한인 교회의 조용한 이웃으로
이번 글에는 미국 내 지역사회에서 한인교회의 역할과 그 의미에 대해 담았다. 내가 성소수자로써 한인교회의 가까운 이웃으로 살게 된 느린 과정도 담겨 있어 경험이 담긴 긴 글이라는 점을 미리 언급한다.
이사
늘 붐비는 맨해튼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내가 아내가 거주하는 곳으로 옮기게 됐을 때는 그냥 너무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다고만 생각했다. 도로사정에 따라 맨해튼까지 한 시간 반 남짓 걸리는 곳이었지만 마치 다른 주에 와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달랐다. 맨해튼에는 화려한 리테일 스토어와 압도적인 디자인의 고급음식점이 줄지어 있는 곳도 있고 급격한 빈부격차가 한 블락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도시계획도 있었다. 예술가들의 허름한 공동 작업공간은 이제 브루클린에만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참 개성 있게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예술가 못지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기를 갖기 전까지는 일을 위해, 여흥을 위해 다채로운 색깔의 맨해튼으로 자주 외출했다. 도시의 에너지와 한적한 거주환경을 공존시키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역시 도시가 편했다. 사람들은 왜 이 동네에 둥지를 틀까 궁금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먼저 부모가 된 사람들과 본격적인 교류가 이어지면서 깨달았다.
이곳은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곳이라는 걸.
우리 동네를 소개합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첫인상이 좀 특이했다. 고속도로와 나무들 사이에 쇼핑몰과 학교, 병원, 놀이터가 간간이 보이고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에는 양질의 공교육이 있고 도시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청소년들이 일탈행동을 할 수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해 스쿨버스나 부모님의 차량에 의존해야 하는 곳. 주변에 대학교가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고 대규모 대학병원의 의료진을 비롯해 병원의 각종 부서에서 근무하는 인구도 많았다. 월스트릿도 아닌데 뜬금없이 오래된 헤지펀드가 하나 있고 동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거대한 실험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다수. 백인 인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높다. 그중 A지역의 평균연령은 대략 52세. 바다가 가까워 요트와 물놀이로 활기찬 여름 분위기와 달리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겨울의 주택가는 스산한 편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한국식당과 한 개의 한국 교회가 있었다. 해쉬택으로 요약해 보자면 #교육 #은퇴 #교수쯤 되려나.
우리 동네 어른들
이런 곳에서 생활하며 이 지역의 한국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 점이 있다.
1.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인 인구가 많다.
고학력의 한국인 인구, 특히 한국인 교환교수의 가족들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러나 일 년 후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인연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2. 긴 박사과정을 거치는 가족들과 교류하며 아이도 함께 키우고 사이도 돈독해질 수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이나 정부 관련 부처에서 자리를 잡거나 타주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다.
3. 교회 커뮤니티에의 의존
‘여기 사는 사람들’로 대변되는 지역사회 주민들이 있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한인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교회의 문화를 존중하며 교회에서 주최하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소규모이다.
나의 좌표
나는 1, 2, 3번과 고루 소통하고 있다.
평소 종교활동(종류를 막론하고. 불교 집안에서 자랐다.)이 주는 안정감을 좋아했던 것을 차치하고 교회는 ‘안전한 커뮤니티’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가 컸다. 총기와 마약이 존재하는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미국생활 초기부터 나는 여러 한인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서비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헌금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낯선 미국생활에 한창 지쳤을 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시간을 기다리고 세례를 받기도 했다. 목사님들의 설교가 대부분 괜찮았지만 타 교회나 종교를 비방하거나 동성애자에 대한 hate speech가 나올 때면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사 후 가끔 들르곤 하는 우리 동네 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그런 점이 없었다. 다 함께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조직을 결속하는 데에 있어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을 법도 한데 참 고지식한 분인가 보다 했다. (가끔 가서인지도? ^^)
아주 느리게, 교회와 공존하기
처음부터 3번에 해당되지는 않았다. 와이프의 친구이자 존경하는 E언니가 교회에 몸담고 있어 가끔 방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첫 아이 또래의 아이의 가족을 소개받는 것을 시작으로 알음알음 비슷한 나이대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알게 됐다. 이렇게 몇 줄로 적지만 모든 일은 아주 느리게 천천히, 최소한 5년에 걸쳐 진행됐다. 길고 긴 가방끈에 걸맞은 지적인 대화가 오고 갈 수 있고 인내심과 겸손함을 겸비한 멋진 아저씨 아줌마들이 명절과 생일에 함께 하고 있었다. (다들 배가 좀 나왔지만 넘어가자) 인정해야 했다. 여러 면에서 귀감이 되는 주변 사람들이 교회에 상주하고 있고 내가 그곳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에 가다
첫 아이가 자라 만 다섯 살이 되어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는 시기가 됐을 때 교회의 한글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한글학교 교실에 들어서자 네 명의 아이들이 보였다. 딸아이와 딸의 친구들 세 명. 다들 사뭇 진지한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청년부 학생이기도 한 선생님과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여유로움도 잠시, 코로나가 시작됐다. 고작 다섯 살이지만 비대면 수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국어를 전공으로 하는 현지의 젊은 선생님이 아이들의 비대면 수업을 이끌때 발음이나 숙제에 오타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에 나는 피드백을 하거나 문제를 오류를 알리는 다소 귀찮은 엄마였다. 일 년쯤 지났을까 교감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성인이 되어 출가한 딸을 둔 권사님이셨다. “어머니가 6, 7세 반을 맡아보시는 거 어때요?” 가르칠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네? 제가 애들을 가르쳐본 적이 없고 전문지식도 부족한데 괜찮을까요?” 그러자 “일 년 동안 애들 학업을 지켜보신 것 만으로 괜찮을 거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 차례 의문을 제기했지만 개강 일주일을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할 수 있다고만 하셨다. ‘한 학기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수업이 시작됐다. 생각과 달리 수업을 구성하기가 힘들어 종일 책을 붙들고 자료를 찾았다. 뭐 다 괜찮았다. 한 학기가 끝나가고 있으므로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 학기에는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겠지.’ 험난한 한 학기였다. 마음속으로 이미 작별인사가 끝나 있었다. 교감선생님으로부터 ‘이번 학기 잘 마무리해 주시고 다음학기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내용의 메일이 도착했다.
롸?
누가 한국어를 가르칠 것인가?
아이가 걷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덩달아 아이의 일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면 함께 피아노를 배워 리사이틀에 나가고 중국어 수업이 있으면 옆에서 같이 수업을 들었다. 발레를 가르쳤을 때는 옆에서 함께 토슈즈를 신고 뛰었다. 야구를 배우면 내가 집에서 배팅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는 알록달록한 짐에서도 기구들을 만져보면서 곧잘 테스트해 보는 편이었다. 당연히 남의 눈이 신경이 쓰였지만 일단 재미가 있었고, 교양을 쌓으면서 관련 분야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아이가 학습동기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아 지속했다. 사실 뭔가를 함께 배운다는 것은 어른의 시선에서 상당히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들끼리의 친목다짐 시간을 어느 정도 포기해도 나쁘지 않을 만큼 배움의 기쁨과 어려움을 다시금 느껴보는 보람이 있었다. 아이에게는 내가 뭔가를 더럽게 못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점이 좋았다. 못하는 걸 지속하다가 어제보다 오늘 덜 못하는 걸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사람들도 곧 그러려니 했다. 그런 내게 E언니가 우연히 장학금을 제공하는 한국어 교육학과에 대한 내용을 보냈을 때도 똑같이 생각했다. ‘한 학기만 해볼까?’ 다시 학생이 되는 일이 부담스럽고 중간에 그만둘까 봐 등록 후에 한동안 혼자만 알고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한국어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정식 과정을 밟자.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의 바쁜 레즈비언 엄마 선생님
코로나 한가운데서 학업을 시작하며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지냈다. 수업은 두 개로 늘어났고 아이들은 자라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뚱한 중고등학교 남자아이들 수업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를 사용할 때도 정확하고 쉽게 표현하려 심혈을 기울였다. 첫째와 둘째는 자주 아프고 결석하는 날이 많아 아이들을 돌보며 학업과 수업에 에너지를 배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미국은 유난히 휴일이 많아 때마다 놀러 가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과제와 밀린 강의가 몸을 조여 오는 듯했다. 한국 아이들끼리 놀게 하려 도서관에 모이면 한국 엄마들이 각종 시험이나 대학원 공부를 위해 놀이공간 옆에 있는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온라인 과정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공부에 나는 혼쭐이 나는 중이었지만 그런 분위기에서는 엄살을 부리기도 힘들었다. 이전 글에도 농담처럼 언급했지만 특히 이곳의 한국사람들은 사납고 자애로운 치와와를 연상시켰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해도 비슷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점을 아주 좋아하고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한글학교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교감선생님/권사님은 교사가 레즈비언인 것을 알고 계실까?
소문이 좋다
문득 교감선생님은 우리가 동성커플인걸 아실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2021년 수업을 시작해 2023년이 됐지만 흔한 식사자리 한번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한글학교에는 나만 주로 첫 아이를 데리고 다녔고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된 후론 확인차 잠깐 수업을 확인하거나 화상으로 이루어지는 직원회의에서 각자 필요한 토픽을 나누는 일이 전부였다. 나는 이곳에 천천히 스며드는 과정에서 긴장상태에 놓이는 일이 많아 소문에도 많이 의존했다. 누군가 나에 대해 미리 알고 있고 나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미리 내 소개를 해주면 고마웠다. 소개도 소문도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했다. 제발 교감 선생님이 알고 계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내게 한 번도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으셨다.
생강청과 와이프
교감, 교장선생님,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선생님 셋이 어렵게 시간을 맞춰 드디어 식사 자리를 잡았다. 수업을 시작한 지 2년 반 만의 일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교감선생님께 직접 나에 대해 언급하고 사회적 합의(?)에 이르러야 했다. 오늘이 아니면 또 2년 반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선생님은 둘째를 가르쳐주고 계셨지만 내 소개를 한 적은 없었다. 수준급의 베이킹 실력을 갖고 계시고 요리를 잘하신다는 것만 소문이 자자한 선생님이 마침 대화중 생강청 만드는 법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미국 일반마트에서 파는 물생강을 이용하면 수분이 충분히 나오지만 홀푸드에서 파는 유기농 생강보다는 효과가 좋지 않다는 내용, 설탕과 배를 넣고 끓이는 것 이외에 별 것 없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아주 날카로운 칼을 꺼냈다.
“와이프 해주면 정말 좋아하겠어요.”
대화는 갸웃하는 듯했지만 끊기지 않았다. 한동안 생강청 만드는 작업에 대한 상세정보가 이어졌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 다른 선생님인 E언니가 갈 시간이 되자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마음이 조급해졌다. ‘마무리를! 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 ㅠㅠ’ E언니와 내가 저녁 수업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의 어려움을 공유하며 교장선생님의 공감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다짜고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커밍아웃 성공하다
“아, 그리고 그동안 제가 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아시다시피 저희 가정이 백그라운드가 좀 복잡하잖아요. 그런데 이해해 주시고 가르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 교감선생님이 입을 여셨다. ”그걸로 인해서.. 뭐 마음에 남아있는 일이 있어요? “ 수많은 커밍아웃을 했지만 처음 들어보는 반응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저야 뭐 이제 애들도 둘이고.. 마음에 남아 있다기보다는 이렇게 커밍아웃을 할 때마다 긴장이 많이 되지요.. “ 곧이어 교장선생님/사모님이 와이프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환이 됐다. 교회의 놀이터가 지어질 때 약간의 기부를 한 것을 기억하셨다.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있나요
임신했을 때 친구들 앞에서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가장 보수적인 한국교회에 가서 커밍아웃을 해버릴 거야 “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러고 나서는? 이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지금의 나를 보면 교회 커뮤니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나인 것 같은데. 새삼 과거의 농담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됐다. 아기는 어떻게 가졌어요? 라는 질문에 비하면 교감 선생님의 반응은 너무 우아한 차원에 있었다. 이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해석의 차이
작은 부분이고 해석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평생 동성애가 성경에서 금기시했던 부분으로 알고 지내셨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회에서 흔하게 듣는 설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첫 번째로 두고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분들께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우리는 행동을 바꾸는 것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이 불안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보이고 싶다. 최소한 둘째가 한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봉사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타인의 생각과 상황이 어떻든 태어난 아이가 다시 뱃속으로 들어가거나 내 결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일상, 교감선생님의 일상, 이 작은 타운에 사는 이웃들과의 매일, 내 커밍아웃도 계속될 것이다. 지금처럼 아주 느리게 녹는 ‘시간’이라는 얼음이 스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이 곳에서의 매일을 이어 가고 싶다. 그 위에 다소 독하지만 향기로운 술을 조금 부어 본다.
Che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