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둘 남매 하나, 한국의 어린이집에 가다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했던 인터뷰가 있다.
"In the back of my mind, there's this constant questioning of am I being treated this way because I'm a woman? Plus, am I being treated this because I'm a Korean?"
"제 마음속에는 항상 이런 의문이 들어요. 내가 여성이라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아닌가? 그리고 내가 한국사람이라서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 아닌가?"
"And I really have to try hard not to read meaning where there is no meaning, basically you know when the other side has said something, to take that at face value and not to be suspicious, not to try to second-guess what he or she is saying."
"숨은 의미가 없는 말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해요. 그러려고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누군가 무엇을 말했을 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으려고, 상대방이 숨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에 왔다.
보통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동안 한 해 걸러 방문하지만 올해는 2년 연속 방문하게 됐다. 작년 여름엔 습도가 95% 넘는 날씨 때문에 이러다 100%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으며 지나갔다면 (아가미가 생겨야 숨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올해는 연일 33도까지 오른 기온 때문에 폭염주의보를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받는 일상이 이어졌다. 미국의 지인들에게 이곳이 덥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첫 일주일을 보냈다. 한 달이라는 시간도 제법 거리의 영향을 받아 잦았던 연락도 뜸해져 갔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되고 세계가 좁아진다 해도 만질 수 있는 거리에 머물며 비슷한 경험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부분인지. 버스 안에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특유의 선곡을 듣는 한국의 일상이 미국 친구들에게 얼마나 가닿을 수 있었지 생각해 봤다.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거리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둘인 중학생
첫 아이가 네 살 때까지는 특별히 우리와 비슷한 모모가정을 만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었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만남은 맨해튼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힙스터들의 성지 브루클린 덤보에 사는 모모가정이었다. 우연히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의 이모님이 친구분을 소개해주셨다. 이모님의 친구분이 모모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있으니 놀라웠다. 실제로 만난 그분들의 아이들은 이미 중학생이었다. 겨우 알파벳을 삐뚤게 쓰기 시작해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는 것을 제지하는 일상에 무뎌진 내가 중학생 아이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을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아니 아이가 부딪치거나 넘어지지 않고 걸어 다니다니! 스스로 밥을 먹고 싱크대에 그릇을 가져다 놓다니! 믿을 수 없지만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거라니!
모모가정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앞세워 어렵게 사람들을 만나고는 이렇게 평범한 것에 놀라워했다. 이런 종류의 놀라움이라면 주변의 일반가정에서도 구할 수 있었지만 직접 보고 ’ 예상대로 별일 없구나, 일반가정과 비슷한 어려움이 있을 뿐이구나 ‘라는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본 적이 없는 일을 하고 있어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일이 많을 때 현실을 기반으로 한 상상만이 강력한 의미가 된다. 정규학교 이외에 다양한 활동과 한글학교에 다니는 모습이 우리 집의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다양성의 도시 한가운데에서 매일 학교를 보내는 가정답게 대수롭지 않은 듯 "맨해튼에서 이런 건 일도 아니다."라는 말까지 듣고 나니 우리 가족의 미래가 모모가정이라는 사실 하나에만 달린 것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여름엔 일주일에 세 번, 3주 동안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작년에 이어 두 해째다. 1년 전 여름에는 5주 동안 어린이집에 보냈다. 내 한국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짜증을 내던 아이가 갑자기 “여보세요” 하며 집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고 언어환경 조성의 막강한 힘을 목격했다. 그래서 올해도 상황이 되는 만큼 한국에서 어린이집에 보내는 일을 강행했다. 9일 정도 있었을 뿐이었지만 역시나 섬세한 구어체를 익히며 성장을 이어갔다. 작년 여름, 같은 어린이집에서 처음 상담을 했을 때 원장선생님의 친절한 어투와 놀라는 눈이 기억에 남는다. 혐오보다는 낯설음이었다. 몇 년 전이었다면 혐오로 오해했을 법도 한 익숙한 놀라움. 학교 안에서 커밍아웃한 지 10년째,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낯섦을 어디까지 혐오로 오해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강경화 전 장관의 말처럼 Take that at face value. 호기심을 호기심으로, 낯섦을 낯섦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아주 열심을 다한 노력이.
두 번째 등교날에는 가족관계를 써보는 숙제가 제출됐다. 둘째는 숙제를 쓴 종이를 팔랑이며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무슨 대화를 했을까? 미국에서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처럼 자긴 둘째고 엄마가 두 명이고 아빠는 없다고 이야기했겠지. 웃기다며 킥킥대는 친구가 꼭 한 명 있을 테고 선생님은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해서 언급했을 것이다. Family tree 만들기는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는 평범한 학급활동이고 이 활동의 취지는 학급 내 다양한 가족의 모습에 대한 인식과 각 가정의 문화(나라를 포함)를 이해하는 데 있기 때문에 교사가 정상가족의 모습만 인지시키려는 의도로 숙제를 내줬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개인적인 호기심이 깔려 있다고 해도 ‘엄마, 아빠’를 중심으로 한 대화가 잦은 나이인 만큼 미리 짚고 넘어가려는 선한 의도가 바탕이 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어울렸다. 반 친구들과 키즈카페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A 씨는 둘째와 같은 또래 여자아이의 엄마로 작곡입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고 B 씨는 전업주부였다. 두 번째 만남에 “놀라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려요. 저희는 엄마가 둘인 가정이에요.”라고 운을 떼었다. A 씨는 어쩐 일인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바로 알아들었고 B 씨는 “o_o? 음? 뭐라고 남편이 둘이라고? (두리번 갸우뚱)” 하는 모습을 보여 A 씨의 부연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아이의 발달과정에 대한 이야기와 집에 대한 이야기, 미국 생활과 교육 이야기 등등이 이어졌다. 내가 나이가 많은 엄마이긴 한지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느껴져 고마웠다. 엄마가 둘 인 건 어떨지 몰라도 나이가 많다는 것은 한국에서 편리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존중을 받을 수 있으며 이상한 소리를 해대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쉽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절약해 주는지. 대화 끝에 느낀 것은 그쪽이나 나나 모두 건강한 일상을 유지하는데 관심이 많은 평범한 여성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지쳤다 아..) 올해 다시 방문한 어린이집에서 같은 아이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둘째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던 것, 아이들과 함께 엄마들을 만났던 일 모두 또 한 번의 장애물을 넘은 듯 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올해도 같은 곳에 아이를 보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변함없이 호의적인 선생님들과 아이들, 그리고 여전히 멋진 식단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보수단체의 혐오발언이나 악성댓글 같은 것을 보면서 의심스러웠던 온라인 속 현실도 아주 가까운 내 일상의 문을 여니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이거, 다 꿈인가?
이거, 다 꿈인가?
이렇게 갑자기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둘째도, 환대하는 가족들도, 친절한 학교와 사람들도 아리송하다. 십 년 전에는 면전에서 "너 그거 남의 애 낳는 격이고 팔자 센 거다"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끝까지 못 받아들이시면 어떻게 하냐"라는 질문도 끊이지 않았는데. 문을 열어보니 우려들이 연기처럼 없어지기만 하는 썰렁한 일상에 별로 할 말이 없다. "이거, 다 꿈인가?" 밖에는. '그쪽 집 애랑 놀게 할 생각 없다'는 댓글을 걱정하는 출산을 준비 중인 레즈비언 친구들의 걱정근심에 이런 글이 얼마나 가닿을 수 있을지. 아마도 겪어보기 전까지 영원히 닿을 수 없을지도?
애들이 엄마가 골라준 친구랑만 논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