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둘 남매 하나, 한국에 제출한 출생증명서의 행방
Mother, Father
아기가 나온 지 일 년 반 후, 한국 방문 계획을 짰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미뤄뒀던 둘째의 출생신고도 처리할 목적이었다. 아기는 낯선 비행기에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13 시간 동안 선잠을 자는 아이를 들고 비행하려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서 있어도 허리가 끊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비행 후, 인천에서 기다리던 부모님의 차에 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운전을 좋아하는 나지만 누군가 피곤한 나를 위해 운전해 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딸이 되어서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신경을 끄고 잠든 나. 부모님의 눈에는 마치 옆에서 잠든 내 아들처럼 귀엽기를 염치없이 바라본다.
Mother, Mother, Grand Mother
구청에 들어서자 번호표를 뽑았다. 번호표를 받아 드니 한국의 공공기관에 입장했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이 번호표는 빠르면 십분 안에, 아무리 늦어도 삼십 분 안에 목표하는 절차가 끝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의 느긋한 속도에 맞춰 만반의 준비를 했던 도착 전의 비장함은 온데간데없고 번호표의 무게만큼 가벼운 마음만 남았다. 나는 정말 한국에 왔다.
이미 몇 달 전에 출생신고를 위한 서류준비를 위해 뉴욕총영사관에 전화를 했다. 엄마가 두 명인 출생증명서에 대해 언급하니 추후 한국에 방문하게 될 시 출생신고를 하도록 권고했다. 한국의 구청에도 전화를 하자 영사관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 나도 영사관에서 들은 말을 전달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한국에 번호표를 뽑으러 가야만 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며칠 간격으로 오고 간 전화통화와 기다림 끝에 필요한 서류를 안내받았다. 내가 사는 타운에서 발급받은 출생증명서와 번역본이 필요해 직접 번역을 했다. 그 외에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출생증명서를 들고 있는 구청 직원의 눈이 서류에 오래 머물렀다. 준비한 출생신고서에는 두 개의 mother 란이 있다. 첫 번째 mother 부분에 내 이름을 비롯한 기본적인 신상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mother 란에 와이프의 기본정보가 적혀있다. 미국에서는 첫 번째 기재된 mother가 출산 당사자인 birth mom을 의미했지만 한국에서는 그 부분을 정확히 할 근거가 없었다. 여러 가지를 문의하던 담당직원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병원외의 장소에서 출산한 사람들을 위한 ’ 출생사실증명서면‘. 증인이 필요한 서류였다.
사진첩에는 병원에서 갓난아기를 안고 졸고 있는 엄마의 사진이 있다. 제왕절개는 회복이 늦기 때문에 입원 기간이 길었다. 움직일 만하다 싶으면 금방 쫓아내 버리는 미국병원 답지 않게 일주일이나 입원을 시켜줬다. 덕분에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시간이 많았고 나는 그 모습을 남기는 걸 좋아했다. 2월의 뉴욕은 폭설로 악명이 높다. 병실에 있는 동안 창 밖에서 눈과 비가 오고 가는 장면을 지켜봤다. 약을 먹고 자는 시간이 길어서 많이 볼 수는 없었다. 이틀 후부터 수면 외에는 밥을 먹고 수유를 하고 화장실에 갔다. 열 발자국 너머의 화장실에 가기 위해 가까스로 침대에서 내려와 용무를 끝낼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타인의 부축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수치와 절망이 밀려왔다. 나이가 들어 화장실에 혼자 갈 수 없는 기분이 이런 거라면 하루빨리 죽고 싶을 것 같았다. 뒤척일 때마다 타들어가는 흉터 때문에 욕이 저절로 나왔다. “으악! 씨..ㅂ…” 낮과 밤과 날씨와 계절을 바꿔가는 지구는 무심히 자전과 공전을 반복한다. 내 고통이야 어떻든 어스름하게 드리운 노을이 비치는 지구의 설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병실의 온도를 조절할 수 없어 한기가 돌아 이불을 겹겹이 덮었다. 이 순간 동면에 출산하는 반달가슴곰과 내가 다른 점은 가슴팍의 반달과 제왕절개 유무뿐이었다.
엄마는 모든 것을 지켜본 증인이었다. 그래서 서명을 했다. 타운에서 발급받은 출생증명서를 사용하려면 birth mom을 정확히 하기 위해 병원으로부터 또 다른 확인서를 받아야 하지만 나는 이미 한국에 있고 다시 서류만을 위해 미국에 갈 수 없으므로 엄마의 증명이면 끝나는 ‘출생사실증명서면’을 선택했다. 여러모로 서류 양식에 대해서 제대로 안내받을 수 없음을 느꼈지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본 것에 의의를 두었다. 만약 선례가 되었다면 좋은 일이리라. 아이가 나오자마자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내의 수고와 엄마의 수고 중 엄마 것만 인정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의 성을 따른 아이의 이름을 보니 어쩐지 더 내 아이 같아 기분이 좋았다.
Him
담당자는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이 생길 테니 바뀌게 될 거라는 말을 남겼다. 한 시간 넘게 초지일관 친절하고 침착하게 응대해 준 직원이 남은 서류를 정돈하기 위해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색해 주의를 기울였다. 몸의 중심을 잃을 듯 말 듯 하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가벼운 부상 수준으로 다리가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의 친절의 비결은 역지사지가 아니었을까. 가벼운 번호표가 쓰레기통 속으로 사뿐히 떨어졌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 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