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둘 남매 하나, <모국어를 왜 또 배워?> 애 둘 맘의 시간 확보
한국어교원, 다문화 사회전문가 과정을 이수하며
2년 전, 가벼운 마음으로 거의 아무 생각 없이 서울 소재 대학의 한국어 교육학과에서 학사 과정을 시작했다. 교포 2세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생각보다 모국어를 전달하는 일이 버거워 종일 끙끙 앓다시피 반년을 보내고 시작한 학사과정. 장학금이 지원되는 온라인 과정이고 ‘외국어로써의 한국어 교육’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 괜찮아 보였다. 모국어 배우는 일이 뭐가 그렇게 크게 어려울까 싶기도 했다. 미국에 살면서 내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평생 책임지고 가르칠 사람이 나 밖에 없을 것 같아 진지해지다가도 대충 자격증 같은 것이 나온다면 책임감을 좀 덜 수 있을 거라는 게으른 마음이 내 안에서 사이좋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대책 없이 첫 시험을 치른 후 초반에 가졌던 가볍게 교양을 쌓자는 마음을 포기했다. 진짜, 정말, 리얼 학사학위를 주는 과정이라는 것을 체험한 2년. 모든 과정이 끝났다.
아이 둘 있는 사람의 학업과 시간관리(?) 구겨 넣기
먼저 아래는 가정을 돌보면서 학업을 이어가는 주부의 깨달음. (친정과 시댁의 도움 x, 주말 파트타임 교사, 시작 당시 첫째 7세 둘째 3세)
깨달음 1. 학사학위를 주는 이유는 학사로써의 소임을 다 하기 때문이구나.
20대에 풀타임으로 다니던 학교를 지금 다시 다닌다는 건 틈틈이 그만큼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몰랐다. 시간과 노력이 크게 들지 않을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지만 이것을 오히려 잘한 일로 회고할 수 있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쁘게 보냈다. 과제와 토론, 시험의 데드라인에만 충실하며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깨달음 2. 되긴 되는구나. 그런데 시간 확보는 어떻게?
초기에 예상한 최소한의 확보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2시, 그리고 새벽시간이었다. 정오쯤에는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다. 아이가 아프거나 다쳐 원에 가지 못할 경우는 물론이고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 아내와의 의논거리 등에 밀려 일주일에 반 정도를 계획대로 사용하면 선전한 편이었다. 월요일이 순탄할 경우 목요일과 금요일도 순탄할 거라는 낙천적인 마음도 이 시간을 방해했다. 정오의 시간이 좌절되면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깨달음 3. 더도 덜도 말고 끝만 내자.
밤에 대중없이 깨는 둘째는 3세.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밤 10시부터 2시까지 대중없는 간격으로 빽 소리가 나면 같이 누워서 재우고 잠들고 깨고 잠들고. 새벽 3시나 4시쯤에 아이가 마침내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들면 나도 인사불성인 채로 잠들었다. 이사와 함께 바뀐 환경과 루틴으로 수면교육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아이가 코로나와 감기를 이겨내며 내 온기를 더 필요로 해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잠들려 하는 시점에 누가 자꾸 깨우는 일이 하루 걸러 하루 계속되고 긴 잠을 잘 수 없으니 늘 예민했다. 일상의 잠이야 어찌어찌 해결하고, 문제는 시험. 새벽에 한 시간 정도(x3)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가지려면 계산을 잘해야 했다. 아이가 램수면에 들기 시작하는 15분이 지나자마자 거실로 나와 시험을 봤다. 모두 잠든 시간, 자료를 살펴볼 시간 없이 60분 동안 시험을 보자마자 (정말 믿을 수 없도록 귀신같이) 아이가 깨면 30분 정도 안정시키고 다시 거실로 나와 시험을 봤다. 이 과정을 3일간 반복했다. 한 과목만 보는 날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아이를 진정시키는 동안 같이 잠들면 돌이킬 수 없으니 알람을 꼭 맞춰뒀다. 주말 동안 각 과목을 24시간 안에 시험을 치르면 됐으나 어차피 새벽이 아니면 긴 시간을 낼 수 없으니 그냥 했다. 열심히. 무엇보다 이 새벽에 시험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잘하고 있으니 끝내기만 하자고 생각했다. 주말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기 때문에 와이프와 집 밖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을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 두거나 알아서 해주기를 부탁하고 오전에 밀린 잠을 잤다. 시험기간이라도 할 일이 줄지는 않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잠만 잘 수는 없다. 눈치껏 일어나 어지러운 집안을 돌봤다. 친정의 도움이 아쉽지만 입맛을 다시며 바다 건너 엄마에게는 카톡으로 안부나 전했다. (엄마 사랑하우!)
깨달음 4. 처음 네 번의 시험이 지나면 나머지 네 번의 시험은 좀 수월하구나.
일 년이 지나자 일단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에 착수하느라 낭비하는 시간이 줄었다. 학교의 일정과 시스템, 웹사이트와 친숙해졌고 강의록을 적당한 사이즈로 인쇄하고 정돈해 노트북과 함께 파일에 넣어 접근성 있게 만드는 일 따위가 편안해지고 빨라졌다. 여러 색의 형광펜으로 개요, 목차, 소제목을 분류하고 내용의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시간을 절약했다(이운규 변호사의 유튜브를 참고했다).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차 안에서 10분이라도 강의를 재생하기 위해 테터링 버튼을 재빨리 누르는 일, 각종 토론과 과제의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노트를 데드라인별로 정돈하는 일에도 속도가 붙었다. 학과 이메일과 교수님의 연락처, 장학금, 재직증명서, 추천서 및 학기마다 필요한 서류를 어디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언젠가 익숙했지만 오래전에 잊힌 듯한 사회 속 일들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google drive, google document 등이 능숙해졌고, 학교에서 재학기간 동안 제공하는 워드 프로그램도 유용하게 썼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돈을 내야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고 어색해 머쓱해졌다. 요즘은 문서들을 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 연동해 작성할 수 있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과제를 작성하는 일에도 속도가 붙었다. 코로나가 끝났다. 이수해야 하는 과목도 현저히 줄었다. 첫째도 둘째도 조금 더 말귀를 잘 알아들었다. 둘째가 더 이상 밤에 잠을 설치지 않게 됐다. 대망의 chat GPT가 출현했다. BTS는 갑자기 세계적인 팝스타가 되어 놓고 모두 군대에 가버렸다.
깨달음 4. 에너지는 한정적이구나.
시간을 절약하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가정과 학업 이외의 일들을 단순화 (어느 정도 포기) 했다. 세세하게 챙기던 아기용품의 디테일이 떨어지고 가족들은 엄마가 즉각 반응할 수 없는 상황에 익숙해졌다. 빼놓고 왔거나 없는 물건이 있으면 그냥 불편함을 감수했다. 필수품의 경우 그 자리에서 구입했다. 학교 과제는 가독성 있게 자간이나 문단을 조절하고 과제의 기본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최소한의 작업 외에 배경 색깔과 패턴을 넣는 등 꾸미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입이 짧은 가족들의 식성이 모두 다르고 새로 만든 음식이 아니면 잘 먹지 않아 빠른 조리를 위해 재료를 소분해 두고 요리 방법도 최소화했다. 아이가 둘이기 때문에 더 바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첫째를 키우고 둘째를 맞이할 쯤엔 경력직의 효율(+가족들의 체념)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현생을 사느라 바쁜 친구들은 한동안 없다고 생각하고 방학에 잠깐 얼굴을 보거나 가끔 전화를 했다. SNS가 이럴 때 좋은 거지. 100% 완성도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깨달음. 4 자신을 관찰하는 일에 품이 든다.
첫 학기를 등록하기 전, 가능한 시간을 알아내는 데도 에너지가 들어갔다. 가족들에게 반응하는 직업이 본업이 된 지 오래되어 내 시간에 대한 감을 잃은 상태였다. 코로나로 가족들 모두 집에 머무르게 되었고 두세 시간 이상 통째로 쓸 수 있는 시간 확보는 특별한 이벤트에 가까웠다. 그래도 학업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심어준 계기가 있었다. 매일 특정 리추얼(ritual) 활동을 끝낸 후 짧은 감상을 쓰고 나누며 참여자들 스스로를 독려하는 밑미(meet me)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나를 껴안는 글쓰기(슝슝)를 시작으로 드로잉 리추얼(롤리), 저녁 달리기(상민)를 돌아가며 일 년 동안 참여했다. 30분 정도만 할애하면 되는 짧은 활동이 주를 이뤘고 이 활동을 위해 10분, 15분, 20분 단위로 시간을 활용하려 애쓰는 나를 발견했다. 댓글을 읽고 그룹 내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꽤 많이 소요됐지만 조건 없이 서로를 독려하는 분위기는 리추얼을 열심히 하고 싶게 만들었다. 틈날 때마다 두세 시간 이상 리추얼을 위한 활동에 신경을 쓰는 나를 발견하자 이 시간 활용의 가능성이 보였다. 클라라슈만은 영재출신의 19세기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슈만의 아내로 알려져 있다. 8남매를 키우며 피아니스트와 작곡가의 영역까지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슈만이 작곡한 곡을 연주로 완성하며 생애를 보낸 천재 피아니스트지만 사실 그의 열정은 당시 여자들이 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작곡에 뻗어있었다. 8남매를 키우며 평생 1300여 회의 연주를 한 그의 일상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녀가 모두가 잠든 아침시간을 작곡 활동에 썼을 거라는 사실, 자신에게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공을 들였을 거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다.
특이한 과목
한국어를 잘 가르치기 위해 시작했지만 필수이수학점 때문에 학과 공부 이외에 다른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학교에서는 '다문화 사회전문가 과정'의 이수를 위한 과목을 추천했다. 과목명은 아래와 같았다.
해외동포사회의 이해
한국사회의 다문화현상 이해
국제이주와 노동정책
다문화가족의 상담과 실제
이민법제론
다문화사회 교육론
이민 다문화가족 복지론
이민정책론
이주노동자 상담과 실제
지역사회와 사회통합
등
한국에서 점점 많아지는 외국인 유입에 대비해 관련인력을 양성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였다.
미국에 사는 내가 한국에서나 유효한 다문화 전문가 과정을 이수한다고 해서 도움 될 일이 있을까. 시간낭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명색이 다문화 가정의 엄마인데 들어두면 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문득 시작할 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시간 있을 때 교양으로 들으면 좋을 것 같다는 가벼운 마음이 있었고 장학금, 자격증, 졸업학점으로 서서히 목표의 밀도가 높아졌다. 덫이었다.
그러나 배움이라는 것은 대체로 도움이 되는 일이자 놀라움을 주는 일인가 보다.
이렇게 추가로 듣게 된 과목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