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둘 남매 하나, <한국의 결혼이민 여성과 나>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아내와 내가 뉴욕에서 만난 지 13년이 됐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는 표현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올해도 사용하고 있다.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삶의 목표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목표가 단순하고 먹는 것, 입는 것에도 기본적인 노력만 들이는 듯했다. 유난히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 나 역시 오랜만에 만난 좋은 사람과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 타국에서 잘 버텨 보고자는 결심 외에 복잡한 생각이 없었다. 서로에게 열정이 넘치던 시기가 지나고 점점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다. 이미 미국 생활이 오래되어 적응이 끝난듯한 아내와 달리 나는 누가 툭 치면 눈물이 쏟아지는 상태로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내가 결정한 일을 하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흐르게 되는 자신이 싫고 자존심이 상했다. 인내심이 바닥났다고 생각하면 더 깊은 바닥이 나왔다. 모르는 나라에서 적응한다는 것은 그냥 그런 일이었다. 피할 수 없이 해내야 하는 내 몫의 일이 있다. 누군가 대신해 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전화 통화가 두렵고 간단한 일을 처리하면서 실수를 반복했다. 다행히 일상에서의 더듬거림이 줄고 긴장이 점점 풀렸다. 3년쯤 지나자 아내도 전반적으로 많이 나아졌다는 평가를 해줬다. 그런대로 직장생활도 이어갔다.겉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어느 이민자라도 다 비슷하게 겪는 일이었다.
하루는 한적한 종점의 기차역에서 누군가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큰 보폭으로 지나갔다. 키가 180cm는 넘어 보이는 노란 곱슬머리의 남자. 베이지색 면바지에 드레스셔츠를 입은 평범한 행색의 남자 뒤를 곧바로 쫓았다. 어깨를 낚아채 얼굴을 봤다. 멀쩡한 백인 남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러고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남자의 가슴을 수 차례 밀쳤다. 키가 작은 내가 덩치가 큰 남자를 밀치니 흔들림이 별로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하는 이 남자와 분에 못 이기고 있는 나를 누가 성추행 피해자와 가해자로 볼 수 있을까. 그가 제정신이 아닌 여자를 참아주고 있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때 일을 듣고 "너 미쳤어?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랬어."라는 때늦은 우려도 들었다. 당하다니? 이미 당했는데?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나를 대변하거나 도울 수 없다는 것은 길 한복판에서도 비슷한데 참을 이유가 있을 리가.
"그래 나 미쳤다."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큰 통에 두통약을 팔아서 뭘 어쩌자는 거지? 이걸 유통기한 내에 다 먹을 수는 있는 거야? 정말 이해가 안 된다니까.’ 와이프가 크기에 대한 감각 없이 무심결에 집어온 물건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집에 200알 넘게 들어있는 큰 진통제 병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가장 애용하는 사람은 나였다. 두통을 잦았고 늘 손 닿는 곳에 진통제를 준비해 두면 안심이 됐다. 가방 속에 몇 알 넣어두면 준비성 있고 센스 있는 사람 같아 뿌듯했다. 어느 날, 영원히 바닥나지 않을 것 같은 진통제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조금씩 다 먹은 것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두통약을 먹으면 한 통을 다 먹는데 2년이 걸린다. 일주일에 한 번 이면 4년이다. 이사 온 시기를 어렴풋이 생각해 보니 아마 같은 계절이 두 번 정도 지나기 전인 것 같았다. 용법을 지켜 섭취하고는 있었지만 간식도 아니고 한 달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하던 진통제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이렇게 자주 먹다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사람들을 만났다. 한동안 한국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만나면 이민생활 속 크고 작은 결정에 조언을 구할 수 있고 긴장이 풀려 푹 퍼져 버린다. '지역사회와 사회통합' 과목에서 가정의 지지를 기반으로 거주 국가의 언어에 빨리 익숙해질수록 사회통합에 속도가 붙는다던데. 나는 언제 미국사람들처럼 미국에 완전히 스며들 수 있을까. 오늘도 햄버거를 먹어본다.
"애들은 뭐 주지? 피자랑 파스타, 치킨너겟도 있어. 많이 준비했네! 언니는 뭐 먹을래? 파스타 좀 떠줄까?"
"아.. 그러지 말고 우리는 짬뽕이랑 짜장면 시켜 먹을까?"
우리가 만난 장소가 한국 식당 밀집지역에 위치한 선혜네 집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와.. 언니가 똑똑한 건 원래 알고 있었지만.. 천재 아니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푸하하하, 너도 참. 이 집에 오면 선혜가 그런 걸 시켜주곤 해."
"여기 자주 와야겠는데? 너무 행복하다!"
"그래 , 종종 와!"
모두 아이가 둘씩인 워킹맘들. 우리 집에서 먼 이곳까지 다음에 또 언제 오게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무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람들 역시 자주 오라고 대답해 줬다. 간에 너무 세고 달거나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고 야채를 좋아하는 와이프의 식성 덕분에 나도 식성이 많이 변해 있었다. 채소 위주의 요리법도 많이 알게 됐다. 야채를 많이 먹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래도 짬뽕 짜장, 비냉 물냉을 주문할 때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애들이 어릴 때부터 알던 사람들이라 커밍아웃 같은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으니 여기가 온실이라면 나는 화초였다. 내가 영어 이외에 아내의 모어인 중국어를 조금씩 배우는 것처럼 아내도 한국어를 배우면 참 고마울 텐데. 집에서도 가끔 한국어 농담을 할 수 있다면. 힘든 일이겠지. 아내도 집에 오면 쉬고 싶다.
'다문화 상담의 실제' 예시 속 가명의 여성들은 애쓴다. 같은 나라 출신 사람들의 정서적 지지에 기대어 현지 적응이 늦어지는 것을 감수한다. 내심 남편이 자신의 모국어를 배웠으면 하고 바란다. 열 명 중 한 명이 안 되는 비율로 남편이 아내의 언어를 배우기를 시도한다. 열악한 직장에서 성추행을 당하기도 한다. 가정에서는 자녀와 부모님 사이의 다양한 문제로 언성이 높아진다. 심한 경우 폭력이 오고 간다. 고성도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이 과목을 수강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쉽게 해내던 일이 어려워지는 선택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염치없이 안도하고 있었다. 그동안 받았던 심리상담이 도움이 됐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왜 나만 이렇게 나약해서 눈물을 달고 다니는지.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더딘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게 될 날 이 올 줄은 몰랐다. 자신을 비난하던 자리가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채워졌다. 이런 비겁한 감정을 심리학에서 정상화(normalization)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니 좀 덜 초라해졌다. 그래, 다르게 생각하자. 누가 나를 보면서 정상화를 경험하면 되지.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의 결혼이민 여성들은 멀리까지 와 나를 일으켜 주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케이팝 검색이 쉬워진 아마존의 인공지능 스피커 알렉사에서 ‘너는 나 나는 너’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감사한 날이다.
참고자료
-이성령, 지역사회와 사회통합, 강의록, 2023
-배경임, 순덕기, 다문화사회 지역사회와 사회통합, 공동체, 2022